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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주는 여행자처럼

사원뷰 수영장, 숲 속의 카페. 이곳이 과연 란나 왕국이군요.

by 안긁복의 모두극뽁 Feb 10.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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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마이 여행의 둘째 날이자 이 도시에서 아침에 눈을 뜨는 첫날이다.

3박 4일, 4박 5일의 짧은 일정이었다면

부랴부랴 일어나 얼른 나가서

뭐라도 하나 더 먹고, 어디라도 한 곳 더 갔을 텐데

나에겐 앞으로도 29일이나 남아있으니

오늘은 별다른 계획이 없다.

호캉스를 즐기다 느지막이 올드타운을 산책하고

카페에서 맛있는 커피만 마셔도 좋다.

얼마든지 여유로이 시작할 수 있었다.


커튼을 걷고, 테라스로 나가

어제는 밤늦게 들어와 미처 보지 못했던

숙소 밖의 풍경을 바라본다.

새벽부터 세찬 비가 내려서 잠을 설쳤는데

(태국 전역에 홍수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다행히 비가 그쳤다.

구름은 아직 있지만 비가 내린 덕에 오히려 하늘이 맑다.

초록빛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주황색 지붕이 대비를 이루어

빛이 닿은 이 도시의 첫인상을 초록과 주황으로 각인시킨다.

테라스에서 바라본 올드타운, 저 멀리 수텝산과 왓쩨디루앙이 보인다.


테라스에서 돌아오니 남편은 노트북을 꺼내

급하게 일처리해야 할 것들을 처리하고 있다.

역시나 바쁜 일정을 계획해 두었더라면

’아니 왜 여행지까지 와서 일을 하고 있어!‘ 라며 부아가 치밀었겠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일처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기다릴 수 있다.

‘디지털 노마드가 이런 건가?‘ 하는 잠깐의 행복한 상상에도 젖어본다.

여유로운 일정 덕을 톡톡히 보는 남편


함께 조식당에서 조식을 먹었다.

내가 갔던 치앙마이 호텔들은 조식당이 뷔페식으로 된 곳이 별로 없었다.

(내가 머문 4,5성급 호텔 4곳 중 1곳만 뷔페식이었음).

처음으로 숙박한 곳은 전날 미리 메뉴를 주문받는 곳이었다.

인당 한 가지 메인 메뉴와 두 가지 음료를 고를 수 있었다.

메인 메뉴는 양식과 태국식(태식)으로 구분되어 꽤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나는 오믈렛과 토스트, 샐러드, 베이컨이 나오는 브레키를 선택했다.

이미 한 접시에 이 모든 것이 담겼음에도 빵과 버터, 음료 두 잔까지 나오니

아침부터 아주 헤비하고 해피한 식사가 시작된다.

맛도 훌륭해서 숙박객이 아니어도, 지나가던 여행객들도 워크인으로 들어와서

아침을 먹거나 브런치를 즐기는 듯했다.

이틀간의 조식. 점심저녁은 태식이기 때문에 조식은 주로 양식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후 부른 배를 부여잡고 호텔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작지만 운동시설도 갖춰두었고, 마사지샵과 스파가 있어

여행을 마치고 들어와 피로를 풀기 좋아 보였다.


치앙마이가 내게는 너무 좋은 여행 선택지였지만.

단 하나 아쉬운 것이 있다면 바다나 강 등 수영을 즐길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도시를 위에서 아래로 가로지르는 핑강이 있기는 하다.

이 도시의 젖줄이지만, 외부인이 보면 물색깔에 놀랄 수 있다.

흙탕물과 x물 그 사이 어느 정도로 보이는 강물의 느낌이다.

그래서 자연적으로 수영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만큼 호텔이나 숙소는 작더라도 수영장을 갖춘 곳들이 많았다.

풀빌라까지는 아니더라도 숙소에 딸린 수영장에서 얼마든지 수영을 즐길 수 있고,

사설 수영장도 꽤 크고 수질 관리도 잘 되는데 가격도 저렴한 곳들이 여러 곳 있었다.

(치앙마이의 수영장들만 모아 소개하는 글도 연재예정이다)


어쨌거나, 내게는 이 호텔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가 ‘예쁜 수영장’이었다.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해가 쨍쨍해지고, 하늘이 맑아졌다.

수영하기 딱 좋은 날씨다.

얼른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 사이드로 향했다.

9월 말경 치앙마이는 우기였지만, 비가 오지 않을 때 햇볕은 우리나라 여름보다 뜨거웠다.

(치앙마이는 11월-1월이 건기이자, 서늘하고 따뜻해 여행하기 좋은 성수기이다.)

정오의 태양은 우리를 얼른 수영장에 뛰어들도록 했다.

이 시간대에 사람이 별로 없는 건 아마도 가장 뜨거운 시간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초보 여행자들은 피부를 내어주고, 수영장 전세사용권을 얻었다.

수영도 하고, 썬베드에 누워 책도 읽고, 음료도 마시고, 사진도 찍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즐겼다.

오후가 되어서야 호텔을 나섰다.

나서자마자 양쪽에 사원이 하나씩 보인다.

아직은 어떤 사원인지는 모르겠지만

둘 다 금을 휘둘렀다.

과연 옛 란나왕국의 수도였던 곳답다.


조금 걷다 보니 한국인 여행객들에게 아주 인기가 좋은

갈비국수 맛집, 블루누들에 이르렀다.

수영 후에 면은 국룰 아닌가.

미쉐린 가이드에 올라간 집이어서

웨이팅이 무척 길다고 해 걱정했는데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2시경에는

바로 입장이 가능했다.

끓고있는 육수와 고기

면의 두께와 종류, 고기의 종류를 골라 주문하는 시스템이었다.

아주 오래오래 푹 끓인 듯한 육수에

치앙마이(태국 북부) 지역에서 즐겨 먹는다는 에그 누들, 면 두께는 가장 얇게,

소고기 생고기를 선택해 먹었는데 무척 진하고 맛있었다.

한국인이라면 호불호가 없을 맛이라던 구글맵 리뷰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순간이었다.

실수가 있었다면 작은 사이즈와 큰 사이즈 중 작은 사이즈를 택했다는 것.

세 젓가락 먹으니 한 그릇 뚝딱이 었다.

큰 사이즈, 소갈비, 두꺼운 면을 시킨 남편 그릇을 쳐다봤더니

눈치 빠른 그는 한 젓가락을 나눠주었다.

고기가 알차게 들어간 갈비국수 / 싹 비운 우리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올드타운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올드타운은 고대 란나왕조의 도시 흔적을 간직한 지역으로

고풍스러운 사원과 전통 가옥이 많은 곳이다.

정확하게 정사각형 모양으로 구획된 구역이며,

정사각형 모양의 외부를 성벽과 해자가 둘러싸고 있다.

여행자들, 특히 러너들은 이 올드타운 외곽을 한 바퀴 완주하는 것이

또 하나의 여행 목적일 정도로 타운 둘레가 6.5km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정사각형 도시의 끝에서 끝까지는 최소 40분은 걸어야 하고,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그렇게 걷는 것은 쉽지 않았다.

10여분 걸었을까, 분홍색 꽃나무가 아주 아름답게 피어있는

한 카페에 들어가 잠시 커피를 마시며 쉬기로 했다.

(원래 다른 카페에 가려던 길이었다.)

유럽같은 올드타운의 건물들과 우연히 발견한 카페

커피를 주문하고 앉아 있는데 고양이 몇 마리가 우리 근처로 왔다.

쭈뼛쭈뼛 쳐다보고 있는 우리에게 주인이 다가와

자기가 사료를 주고 있는 고양이들이라며 아주 착하다고 했다.

용기를 내어 한 번 만져보고는 커피를 마시는데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아주 시원하고 맛있었다.

왜 이곳 커피가 신선하다고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쩐내나 탄내가 전혀 나지 않는 향기롭고 상큼한 맛이었다.


나지막이 내뱉은 내 감탄을 들었는지 주인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있다가

“어때 맛있지?” 하고 자신 있게 물어봤다.

그리고는 치앙마이 외곽에 있는 도시에 가족이 운영하는 커피농장이 있고,

그곳에 있는 다른 농장들을 돕기 위해 조합을 설립하고

그 커피콩들로 이곳에서 커피를 내린다는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또 그가 방콕의 대학에서 예술을 전공했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와

가업을 이어간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그리고 이 곳의 꽃나무가 1000년도 전에

유럽사람들이 이 곳에 심었다는 것도 알려줬다.


영어가 서툴렀기 때문인지 오히려 그의 말은 더 잘 들렸고,

우리가 별 대답을 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그의 이야기가 이어졌기 때문에

오히려 편안했다.

한 달을 이 도시에 머문다고 했더니 박수를 치며

꼭 다시 오라고, 그땐 다른 농장 원두로 내려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옆테이블로 옮겨 다른 손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 있던 서양인 여자 손님은 꽤 자주 오는지 아주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또 몇 분 후, 평상에 앉아 있던(요가 구루처럼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이었다) 손님과

담배를 나눠 피우며 또 한참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제까지 이 도시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한 사람과 고작 몇 분 이야기를 나눴을 뿐이지만

기꺼이 그의 마당 한 켠에 자리를 내어주고,

자신이 유학생활과 가업과,

가족농장의 위치까지 알려준

친구가 하나 생겼다.

그리고 그 친구는 친구가 아주 많아 보였다.

기대하지 않았던 환대에 우리는 괜히 든든해졌다.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는 그곳을 나와

원래 가려던 카페로 향했다.


이번엔 걷지 않고 택시를 탔는데

막상 택시를 탔더니 5분 안에 도착하는 아주 가까운 거리였다.

그냥 사람들이 사는 평범한 동네인데

공터에 들어가니 엄청나게 큰 마당과 숲이 펼쳐졌다.

목조 건물이 하나가 있는데 그곳이 작은 카페이고

마당에 아무 곳에나 의자와 테이블을 펴고 앉을 수 있는 곳이었다.

작은 숲 전체가 카페인 곳이었다.

우리는 연꽃이 피어있는 작은 호수 옆에 캠핑 의자를 펴고

앉아 차를 마시며 책을 읽었다.

새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으니

평화 그 자체를 경험하는 것 같았다.

혼자 온 분들도 많았고 역시나 책을 펼쳐 읽는 사람들이 많았다.

디지털 디톡스가 절로 되는 기분이었다.

여행하며 여기는 꼭 다시 오리라 다짐했다.


카페에서 나와 또 한국인들이 꼭 가야 한다는

항아리 삼겹살 맛집에 갔다.

항아리에 통삼겹과 통닭을 구워내는 집이었다.

얼음컵에 따른 시원한 맥주와 함께 먹으니

남편과 나는 한국에서 먹는 삼겹살과 통닭이 더 맛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아직 한국의 맛이 그립지 않을 때 이 식당에 왔기 때문에

익숙한 맛이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 모른다.

여기서 더 오래 살면서 한국이 그리워질 때 다시 한번 먹어봐야지.

항아리 삼겹살, 통닭구이, 옥수수솜땀과 얼음맥주는 최고의 조합


오늘 하루 돌아다녔는데 벌써 단골집 예약만 세 곳이다.

그만큼 이 도시가 맘에 든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첫 주는 로컬 맛집보다는

유명한 맛집을 가고

아직 거리 가늠이 되지 않아

아주 가까운 거리는 택시를 부르고

꽤 먼 거리는 걸어 다니며

그야말로 관광객처럼 보냈다.

아무래도 남편은 고작 3박 4일을 이곳에서 보내니

엑기스만 맛보게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싶었다.


그래 첫 주는 본격적인 ‘살아보는 여행’의 전초전이라고 해두자.

기대하시라, 한 달 동안 내 머릿속에 이 도시의 지도를

내가 사는 도시 서울만큼 그릴 수 있을 테니.


우리는 환대에 의해
사회 안에 들어가며
사람이 된다.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리/장소를 갖는 것이다.

환대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이다.
(김현경, <사람, 장소,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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