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조연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힘

<키르케>를 읽고

by 책한엄마

#북클럽문학동네,#키르케,#뭉클팩


어렸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가 정말 재밌었다. 전래동화와 함께 어린 아이 시각에서 너무도 이해할 수 있었던 그 이야기들. 희로애락과 온갖 원시적인 욕망이 범벅이 되어 나온 이야기. 커 가면서 나는 그 반대 방향이 옳은 어른으로 커 가는 방법이라고 교육받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신화는 그저 어릴 때 재밌었던 이야기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키르케<문학동네,매들린 밀러 저,이은성 옮김
행복한 인간은 열심히 사느라 정신이 없거든. 아무한테도 신세를 진 게 없다고 생각하고. (p126)


이런 신화 이야기를 어른 눈높이에 맞추어 쓴 작가가 있다. 그 신은 왜 그랬는지 어떤 생각을 했을 지 현대인이 그 신을 더 이상 광기 어린 변덕쟁이가 아니라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사람으로 다시 만든 이야기. 메들린 밀러는 ‘키르케’이전 책 ‘아킬레우스의 노래’로 화려하게 신인 신고식을 한 작가다. 그만큼 다음 작품은 부담이 되기 마련. 나는 공교롭게도 두 번째 작품인 ‘키르케’로 첫 만남을 했다. 그녀가 작가가 되기까지 얼마나 단단한 생각과 글솜씨로 책을 써내려 갔는지 알기 충분한 책이었다. 키르케는 이제껏 내가 알고 있지 않은 신이었다. 가끔 보이는 작품 해설을 보니 ‘오디세이아’라는 오래된 책 안에 잠시 조연으로 스쳐가는 하급 신이라고 한다. 그런 조연 내지는 엑스트라에 지나지 않은 인물에게 주연이라는 자리를 선물한 사람이 바로 이 작가다. 나는 이런 책이 좋다. 다른 사람이 눈길을 갖지 않은 무언가에 사랑을 줄 수 있는 사람. 게다가 사실 관계만을 나열했을 때는 이해할 수 없는 마녀 그 자체였지만 그녀의 설명 아래 그녀는 사람을 사랑하기에 그럴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특별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다.

키르케와 오디세우스
난생처음으로 인간들의 차가운 저승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적어도 그들의 일부분은 계속 살아남을 수 있었다.(p.237)


키르케는 태양신 아버지와 요정 엄마 사이에 태어난 하급 신이다. 신라 계급제로 치면 성골은 아니고 진골 정도라면 이해가 될까? 키르케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인간에 대한 동경이 컸다. 인간 아들 프로메테우스에게 내린 벌에 대해 듣고 그가 굉장히 변덕스러운 인물임을 알게 된다. 참 신기한 게 인간을 좋아하면서도 질투하며 괴롭히는 모습이 부녀가 아주 많이 닮아 있다. 그런 비슷함은 숨기고 싶은 마음이었기에 그런지 서로를 증오하고 권력이 있는 아비는 딸을 섬에 가둬 둔다. 여행과 전령의 신 에르메스가 그 섬에 드나드는 것도 가끔 말 안 듣는 신의 딸들이 이곳을 참회의 장소로 삼는 것,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 배에 오른 사내들이 이 섬에 오는 것도 결국 아버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서로 원하면서 원망하는 오묘한 관계다.

노려보는 키르케
나는 응당한 능력으로 이글거리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늘의 위대한 파수꾼, 구세주, 만물을 꿰뚫어보는 빛의 전달자. (p.469)

신만큼 호기로운 매력을 갖고 있는 오디세우스는 키르케가 있는 섬에 시간을 보낸다. 그를 보내 준 후 아들을 잉태한 키르케. 그들에게는 슬픈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키르케가 갖고 있는 억울함과 보이지 않는 분노라는 감정을 그대로 끌어안고 이 책을 읽으면 한숨도 쉬지 않고 500페이지에 가까운 이 책을 끝낼 수 있다. 오히려 일부러 그 감정을 외면하기 위해 책을 덮으면 다시 이 마음을 찾기까지 한참 헤매야 했다.

섬에 있는 키르케
아무도 오지 않는다는 것, 아무도 올 일이 없다는 것. 그 자체가 두려운 사실이었지만 공포로 얼룩진 긴 밤을 보내고 났더니 모든 게 사소하고 대수롭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p.108)

이 책은 내가 갖고 있는 많은 생각 구조를 바꿔주었다. 세상에 계급이란 게 존재할까? 인간을 사랑한 신은 죽지 못하는 형벌을 받은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신 또한 끊임없이 자신이 연약하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인간에게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며 살아나간다. 결국 삶이란 어떤 존재에게 평등하게 부과하는 무게가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일그러진 캐릭터였던 키르케가 비로소 위대해졌다. 그녀에게 숨과 영혼을 불어넣어준 작가에게 키르케 대신 감사를 전하고 싶다.

예전에 아버지가 지상에는 그의 뜨고 짐을 기록하는 천문학자라는 인간들이 있다고 했던 게 기억이 났다. 그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최고로 존경을 받았고 왕의 고문으로 왕실에서 지냈지만, 아버지는 가끔 여기저기에서 미적거려 그들의 계산을 어그러뜨렸다. 그러면 이 천문학자들은 섬기는 왕 앞으로 끌려가 사기죄로 처형당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는 미소를 지었다. 당해도 싸지, 그가 말했다. 태양신 헬리오스는 오로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움직였고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말할 수 없었다. (p.20)
헬리오스와 프로메테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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