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현선 Apr 15. 2024

홍콩. 흐늘흐늘 떠다니다 말 뿐

 연초에 재미 삼아 신점을 봤는데 올해가 나에게는 정말 힘든 한 해라고 했다. 확 곤두박질쳐야 하는 해이니 몸을 사리고 또 사리라고.

 과연 그 말을 들은 날 이후로 내 주변의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 나는 너무 힘들었고, 그 점사를 떠올릴 때면 그런 말을 들어버렸기 때문에 그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착착 힘들어졌다.


 그래서 충동적으로 홍콩행 비행기표를 사고 생각했다. 기분 좋은 일 하나 정도 어떻게든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사실 당장 닥친 문제들을 견뎌내는 것 만으로 남은 기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손발톱을 깎거나 방을 청소하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항공권만 사면 어떻게든 가기는 간다. 그런데 이번엔 계획을 짠다든지 할 여유조차 없는 걸.


 일단 한국인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를 예약했다. 공항에서 찾아가는 길이 사진까지 첨부해 안내되어 있고, 무슨 문제가 생겨도 도움을 받기 쉬울 테니 안심이다.

 어디에 가면 좋을지 모르겠으면 사장님한테 추천해 달래지 뭐. 계획 짜기는 이걸로 끝.


 그리고 다음으로는 영화 ‘중경삼림’을 봤다. 주말에 한 번 보고, 그리고 회사에서 점심시간에 또 봤다.

 몇 달째 점심시간에도 컴퓨터와 전화통을 붙들고 일하면서 식사도 빵과 우유로 때워왔다.  점심시간에 일을 하지 않은 게 얼마만인지.

 다들 식당에 내려가 빈 사무실에서 전등을 꺼두고 따뜻한 커피를 내려다 놓고서. 이미 다 본 영화의 시작부터 중간쯤 까지를 한번 더 봤다.


 그러고 났더니 좀 숨이 쉬어졌다. 내가 캘리포니아로 떠나버려도 기다려 줄 양조위는 없지만 왠지 훌쩍 떠나도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출근길에는 볼빨간사춘기의 ‘여행’을 들었고, 퇴근길에는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끄트머리를 들었다. 나를 골머리 썩게 하던 일들엔 하나하나 이별을 고했다.

 내가 던질 수 있는 게 出師表인지 辭表인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속으로만 앓던 말들도 그냥 막 던지고 다녔다.

 삶의 미니멀리즘. 가볍게 보려 하니 모든 것들이 매듭지어지고 해결되기 시작했다.


 아래로 확 곤두박질치는 한 해라고 했는데 나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가벼운 모양이다. 휘-휘- 좀 흩날리다 말았다. 운석처럼 뚝 떨어져 땅에 박히지는 못할 팔자다.



 나는 원래 그렇게 흐늘흐늘한 게 좋다. 좀 마음대로 떠다니는 것들. 그래서 금붕어랑 나비 타투를 가지고 있고 다음엔 해파리를 하고 싶었다.

 전에 누가 내 타투의 의미를 물었을 때도 그렇게 대답했었다.

 하지만 해파리는 아주 무서운 거라는 대답을 들었다.

 ”해파리한테 쏘이면 얼마나 아프다고.. 독이 있는 것도 있어.“


 해파리는 연약해 보이는데 그런 걸 숨기고 있구나. 나랑은 다르다. 그래서 해파리 타투를 하는 건 관두었다.

 나는 그냥 휘-휘-. 그게 전부다. 위로 오르는 듯 보일 때조차 그냥 적당히 바람에 휘둘리고 있을 뿐이었다.


 오후 비행기로 도착한 홍콩은 습도가 95퍼센트까지 올라갔고, 달랑 에코백 하나 들고 간 내 짐에는 한국인답게 제니베이커리의 버터쿠키가 채워졌다.

충킹맨션 앞의 횡단보도도 몇 번이나 건넜다. 그러나 괜히 아침의 여유를 즐기겠다고 새벽부터 눈 뜬 내 체력은 겨우 오후 한 시에 브레이크 타임을 선언. 난생 처음으로 하루 일정이 끝나기 전 중간에 숙소에 들어와 쉬다 나갔다.



 사람이 쏟아지듯 넘치는 거리에서 하늘이 파랗다고 들떴다가 갑자기 혼자라는 게 외로워지기도 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상하게 재미가 없고 지쳐서 그 사실이 더없이 슬펐다가도 밥은 먹어야겠어서 식당을 찾아 다시 걸었다. 그리고 도시락 집에서 포장해 온 이름 모를 반찬으로 가득 찬 저녁밥이 맛있어서 게스트 하우스 식탁에 앉아 발을 굴렀다. 갑자기 슬퍼졌다가 갑자기 행복해진다.


 기분마저 아무데로나 떼밀려 가는 나. 집에 돌아와서는 짐 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어 들고 온 밀크티 잔에다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내려서 제니 쿠키랑 같이 먹었다.

 카페에서 밀크티를 시켰더니 저 잔에다 줬는데 그게 마음에 들어서 근처 그릇 가게로 가 사 온 것이다. 오래된 카페에서 내어 준 잔은 얼마나 오래 썼는지 젖소 그림이랑 빨간 배경이 흐릿하게 다 지워져 있었다.

 내 잔이 그렇게 낡아져서 누가 보고 좀 버리라고 해도, 이게 바로 홍콩 감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내 맘인데 뭐 어때.

매거진의 이전글 단양. 뚜벅뚜벅 가을을 지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