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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선 Nov 19. 2024

강릉. 어떤 땅에는 힘이 있다.

 종종 ktx를 타고 강릉에 간다. 내륙에서 나고 자란 터라 바다는 언제 봐도 신나고 바닷가 동네에는 친구나 가족과 함께 했던 즐거운 기억들이 가득하다. 내 머릿속에는 바다를 보기만 해도 들뜨고 마는 스위치 같은 것이 생긴 게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유난히 고된 날들이 찾아올 때도 나는 정신을 차려보면 강릉역 대합실에 내리고 있다.

 어떤 땅에는 어떤 힘이 있어서 발을 딛는 때 유난히도 그런 것들이 솟아올라 정수리까지 치민다.

 강릉 앞바다 어느 해변의 모래사장을 밟을 때면 그렇게 정수리까지 올라온 힘이 내 몸 안에 가득 찬 고된 일, 모진 말, 비뚤어진 마음들을 사악 가지고서 파도처럼 다시 발바닥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그리고 내가 밟고 섰던 땅들을 떠올린다. 어떤 산, 어떤 들판, 어떤 해변, 어떤 보도블록 위까지.


 그렇게 또 찾은 강릉에서 좋아하는 모래색 배낭에 옷가지 몇 개만 달랑 챙겨 들고 안목해변이 보이는 방에 묵었다. 원래는 더 먼 곳으로 떠날 예정이었지만 갑자기 생긴 사정으로 강릉에 머물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짧아진 일정에 필요 없어진 짐은 골라내 집에 택배로 부쳤다. 아마 내 짐이 나보다 먼저 도착할 것이다.


 날씨는 조금 쌀쌀했지만 창문을 열어놓고서. 검은 파도 소리와 희고 푹신한 이불에 감겨 잠들었다.

홀로 떠나온 날에는 종종 침대 옆의 벽에 꼭 붙어 모서리에 붙박이듯이 누워 잠든다. 코와 눈만 겨우 내놓고서. 낯선 방에서 혼자 잠드는 일에는 설렘과 약간의 허전함이 공존한다. 잠자리에 들 때에야 비로소 홀로 뚝 떨어진 느낌. 그러나 오늘은 외롭지는 않다.


 혼자서도 조금 강해진 힘은 몽골 초원의 땅에서 얻었다. 몽골에 여행을 다녀오고서는 한참 뒤에야 깨달은 게 있다. 나는 거기서 그 땅의 기세에 눌려 기가 죽어 있었다.

유목민 집 아이는 한 사람분의 제 몫을 하는 나보다 어른 같았고 양과 염소, 소나 말들은 나보다 멋지게 제 삶을 살아가는 생명들이었다.


 그래서 말 한마디 못 붙여 본 유목민 아이에게 가지고 온 과자를 나눠준 후에야 손 인사를 나눈 것이나 다가와 부비는 아기염소를 번쩍 안아 들어보지 못하고 조심스레 정수리와 뿔만 쓰다듬어 본 것은 조금 아쉽기도 하지만 거긴 그런 땅이었다.


 때로는 나를 압도하고 때로는 나를 품어주는 어떤 땅들. 그리고 고요히 있다 가라고 맞아주는 이 땅. 이불에 감긴 채로 잠들었다 눈 뜬 안목해변의 아침엔 파란 바다가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담배 한 개비와 녹는 아이스크림 들고 길로 나섰어.‘

 그런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느란 비가 안개처럼 가라앉느라 사람 하나 없는 모래사장을 걷는다. 여전히 조금 쌀쌀해서 손에는 아이스크림 대신 편의점에서 산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었다. 이른 아침의 커피 한 모금. 목적지 없는 걸음엔 두려울 것이 없다. 또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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