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아빠, 나 결혼해도 돼?"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아빠, 나 결혼해도 돼?”
어릴 적부터 나의 목표는 늦어도 나이 서른에 첫 아이를 낳는 것이었다. 결혼하고 28살에 나를 어렵게 가졌다는 엄마의 이야기가 나의 무의식에 남게 되었기 때문일까. 한 살이라도 어릴 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빨리 키워서 더 여유로운 중년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다보니 매주 들려오는 결혼식 소식이 어색하지 않은 28살이 되고 나서는 결혼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작게 시작해서 함께 만들어가는 결혼생활을 이상적으로 꿈꾸던 내게는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백수나 다름없는 내 현재 상황에 대해서는 별 다른 고민이 없었다. 어쩌면 ‘어떻게든 둘이 힘을 합치면 먹고살 길은 있겠지’라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남자를 만날 때마다 아주 자연스럽게 결혼을 생각하게 되고,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남자도 만났다. 그렇게 내게도 결혼이라는 것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넘어야하는 산(?)이라고 생각되는 아빠에게 물었다. 내가 결혼한다는 사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아빠는 한참동안 질문에 대해 답이 없었다. 워낙 수다스럽게 쏟아내는 나의 질문에 꽤나 높은 확률로 ‘노코멘트’ 대응을 하는 아빠인지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아빠는 내게 갑자기 너무나 이상한 제안을 했다.
“지민아, 네팔가자. 2주. 비행기 표 예약해놨어.”
헐. 내게 별 다른 상의 없이 이미 비행기표를 끊어놨단다. 나름대로 내가 제일 덜 바쁠 것 같은 날을 고민해서 했다는데 나의 의사보다 아빠의 의사가 더 중요한 상황이 짜증부터 났다. 학생들만큼이나 놀러다닐 수 있는 방학을 좋아하는 교수님인 우리 아빠는 이번 학기가 안식학기라고 한다. 그렇지않아도 이미 줄줄이 여행 계획이 잡혀있는데 왜 하필 나와 네팔이란 말인가.
출퇴근을 하지 않으니 내 스케줄은 아빠한테 중요하지 않느냐며 한바탕 짜증을 냈지만 아빠가 결심한 모든 것은 항상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아빠의 못 말리는 추진력은 둘째 치고, 아빠의 계획을 뒤집어 버릴만한 배짱이 없는 나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래, 이왕 가야할 거라면 가서 내가 결혼할 준비가 된 능력있고 성숙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아빠한테 증명해보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결혼을 하게 되면 아빠를 설득하는 과정을 거쳐야할텐데 네팔에서 함께 여행을 하면서 그 과정을 집중적으로 하고 올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60일이나 혼자 세계여행을 하고 38개국 여행 경력을 자랑하는 나이지만, 이번 여행만큼은 별로 자신이 없다. 나 잘 하고 올 수 있을까?
“아빠, 나 결혼해도 돼?”
갑자기 딸이 물었다. 요즘 남자친구 자랑을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하기에 그렇잖아도 마음이 불편했는데 결국 올 것이 왔다.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일단 참고 말을 아꼈다. 언제나 그랬듯 내가 말이 없으니 딸은 질문만 던지고 휑하니 가버린다.
생각해보니 나도 28살에 결혼을 했고, 딸아이도 올해 28살이다. 아직도 나는 우리 딸이 기저귀를 차고 돌아다닐 때가 눈에 선하고, 요즘도 제 앞가림은 제대로 하고 있는건지 걱정이 많은데 어느새 벌써 이 아이가 결혼할 나이가 되긴 되었나보다.
결혼 후 2년 만에 아내가 어렵게 임신을 했을 때 내 지병이 재발했었다. 만성 간염. 간경화를 거쳐 간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병이다. 그때 주치의에게 물었다.
"지금의 제 몸 상태로 아이를 가져도 되나요?"
당시 주치의는 내 질문을 피하며 좀 더 다른 검사를 하자고 했다. 그러나 그 다른 검사들의 결과를 보면서도 내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았다. 병원을 나오면서 나는 주치의의 대답을 알고 있었다. 그 때 나는 정말 간절하게 기도했었다.
‘주여, 이 모든 것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짐을 믿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아내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제 아이가 성인이 될 때 까지만 제 생을 보장해 주셔서 아버지로서 해야 할 일들을 할 수 있게 해주세요."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면서 키웠던 뱃속의 딸이 대학을 입학하고 심지어 대학원을 졸업하고 이제 나이가 차서 결혼할 마음이 있단다. 이제 진짜 집에서 떠나보낼 시간이 되었다는 생각이 드니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식학기를 맞아 딸에게 둘만의 여행을 제안하기로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아빠와 딸, 둘만의 여행을. 딸에게 넌 아직 결혼할 준비가 안되었다고 말하고 싶은데 실은 내가 준비되지 않은 것 같다. 나 잘하고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