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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지민 Oct 13. 2015

누군가의 역할, 그리고 기대

우리는 ‘가족’이라는 특수한 관계 속에 있다.

출발 당일



딸의 이야기     


출발 당일. 아침 비행기라 새벽 5시에 나가야만했다. 여행을 위해 동이 트기 전 출발하는 것은 너무나도 익숙하다. 아침에 눈을 떠보면 차 뒷자리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주말의 일상이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아빠는 나와 동생이 여행이 대체 뭔지도 몰랐을 어린 나이부터 주말마다 우리를 데리고 어디론가 떠났다. 우리 가족 중 유일하게 아침잠이 없는 아빠는 항상 한산한 새벽에 일찍 출발하는 것을 선호했고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 나서야만 했다. 일찍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매 번 찡찡거렸던 어린 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오늘은 내가 먼저 일어나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나도 어느 새 아빠의 모습을 닮은 딸이 되어 있었다.     


“지민아, 아빠 잘 보살펴. 싸우지 말고.”


배웅을 나온 엄마가 내게 마지막 당부를 한다. “응, 알았어.”라고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돌아섰지만, 그 말 자체가 아주 생소했다. 내가 아빠를 보살펴야한다니. 처음으로 내가 부모님을 챙겨야한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미국 유학시절 부모님이 나를 만나러 오셨을 때였다. 현지에서는 내가 운전을 하고, 내가 계산을 하고, 내가 갈 곳을 정해야만 했다. 아빠의 말 한 마디를 따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 따라나서던 내 어릴 적 모습이 이제는 부모님에게서 보였다. 원래대로면 엄마는 아빠에게 나를 잘 보살피라는 당부를 했어야 하건만, 이제는 아빠가 아닌 내게 아빠를 잘 보살피라는 당부를 한다. 조금 부담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보살핌을 받는 데 익숙했던 내가 과연 아빠를 잘 보살필 수 있을까?


카트만두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영화 <국제시장>을 봤다. 영어 제목은 ‘Ode to My Father’ ‘아버지를 위한 서정시’라는 뜻이다. ‘덕수’라는 인물을 통해 전형적인 우리나라의 아버지상을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그런데 덕수는 ‘아버지’가 아니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은 가족의 장남으로서 동생의 등록금을 벌고, 결혼 자금을 대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등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보는 ‘아버지역할 을 대신하였을 뿐, 그들의 진짜 아버지는 아니었다.      


모든 가족, 모든 관계에는 역할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역할은 시간에 따라, 상황에 따라 누군가가 짊어지게 된다. 그동안 아빠는 나를 보호하고 보살피는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이제는 내가 스물 여덟살, 처음으로 아빠가 나를 만나 ‘아버지의 역할 을 시작했던 나이가 되니, 가끔은 내게도 아빠를 보살피는 역할을 할 기회가 생긴다. 아마 시간이 지날수록 내게는 아빠를 보살필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다. 엄마의 마지막 말 한 마디가 부담스러웠던 동시에 기분이 좋았던 건 평생 아빠에게 받기만 했던 ‘보살핌’을 이번 여행에서는 나도 아빠에게 조금은 돌려줄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옆 자리에 앉아있는 아빠도 이 영화를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말을 걸었다.  


“아빠, 국제시장 영화 한번 봐 바.”



아빠의 이야기

     

“아빠, 국제시장 영화 한번 봐 바.”

 

비행기 안에서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영화 채널을 돌리는 중 딸이 영화를 하나 추천한다. 영화 <국제시장>이 꽤나 인기를 끌었고, 많은 사람들을 울게 만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미성숙한 아이에게 부모의 존재는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모든 것을 부모에게 의존해야 하는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에게 인정받고, 또 많은 것을 부모로부터 얻고자 한다. ‘공산주의가 멸망한 것은 인간의 인정욕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후쿠야마도 말하지 않았던가. 영화 <국제시장>에서도 주인공 덕수는 피난 속에서 “내가 없을 때는 네가 가장이다.”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평생 잊지 못했다. 만약 그러한 아버지의 기대가 없었다면 과연 주인공의 인생이 그와 같이 희생으로 가득했을까? 모든 자식은 누구보다도 ‘부모’에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얼마 전 하버드와 스탠포드에 동시에 합격했다고 거짓말을 했던 어느 집 딸의 이야기도 그러한 중압감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나는 내 아이들에게 기대하지 않는 아버지였을까? 인간은 막연하게 본인의 일은 잘 될거라 믿는 이기적인 낙천주의자라고 생각한다. 모든 부모들은 아이가 어릴 때 다른 집 아이들은 몰라도 우리 아이들은 대학도 잘 가고, 직장도 잘 구하고, 결혼도 잘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대학 진학을 목전에 두면 현실을 마주하고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그때는 최악의 상황을 보는 비관주의자가 되어 초조한 마음에 주변의 ‘엄친아’ 사례를 들이대면서 아이들을 볶고 다그치기 시작한다.


내게는 함께 여행 중인 딸 말고도 올해 취직한 아들이 하나 있다. 대학 시절부터 독립하고 싶다 노래를 부르더니 드디어 회사가 공식적으로 가출할 명목을 제공했다. 회사가 멀다는 핑계로 집에 좀 오라는 부모의 요구에 선심 쓰듯 한 달에 한두 번 올까말까 하고, 회사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빠의 전화도 잘 받지 않는 아주 독립적인(?) 아들이다. 어느 날, 가족의 카톡방에서 항상 읽기만 하고 참여는 없는 아들이 웬일로 글을 하나 링크했다. ‘아이들은 이미 다 알고 있다’라는 기사였다.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 살길을 찾아 떠난다. 무의식이 갖고 있는 근원적 건강성 내지 균형성 덕분이다. 아무 것도 모를 것 같은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가만히 보면 어른보다 더 합리적이고 온전한 존재이다."     


아마도 내 아들이 이 글을 온 가족이 읽으라 한 이유는 “나 좀 내버려둬도 괜찮아.”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대부분의 부모는 자식에게 잔소리를 한다. 과연 어떤 부모가 “나는 절대 자식에게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부모의 잔소리는 자식에 대한 일방적인 기대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잔소리의 여부는 부모가 아니라 자식에게 물어야 한다. 성희롱이나 성추행의 여부는 피해자가 조금이라도 불편한 감정이 있었느냐에 의해 결정되듯이 말이다. 나는 과연 아이들에 대한 나의 기대를 잔소리로 표현하지는 않았을까? 여행 중에 딸에게 은근슬쩍 한번 물어봐야겠다.      


“딸아, 혹시 내가 네게 잔소리를 하진 않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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