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하기도, 억울하기도 했다.
아침 7시 30분. 도현이를 시간 맞춰 깨웠다. 전날 저녁, 가방을 미리 싸두었고, 매 번 잊어버렸던 미술가운도 넣어두었다. 달걀을 굽고, 토스트에 잼을 발라 접시에 올렸다. 눈을 비비며 아침을 먹는 도현이가 오늘따라 더 사랑스럽다.
익숙해야 할 일상이지만, 아직은 낯설다. 피곤하지 않은 아침, 눈이 뻐근하지 않은 아침, 머리가 띵하지 않은 아침이다. 언제 내가 이런 아침을 맞아본 적이 있었던가. 세상이 고요해진 느낌이다.
“도현이가 일찍 오니 친구들이 좋아해요~”
9시 정각에 시간 맞춰 등원을 했다.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이가 시간에 맞춰오는 걸 좋아하시는 듯하다. 시간에 맞춰서 등원을 하는 것이 이렇게 뿌듯한 일이라니. 오늘은 빼먹은 준비물도 없었다. 이제야 제대로 된 엄마 노릇을 해주고 있는 기분이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길, 하늘이 맑았다. 햇살이 밝고 공기가 시원하다는 걸, 얼마 만에 느껴보는지 모르겠다. 이대로만 생활이 유지된다면, 다음 주부터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는 스케줄도 전혀 무리가 없겠다.
오늘은 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복용한 지 사흘째 되는 아침이다.
첫날은 두근거림에 불안했지만, 둘째 날부터 조금씩 달라졌다.
무언가가 바뀌고 있었다.
머릿속이 조용해졌다.
단지 조용하다는 게, 이렇게 큰 변화일 줄 몰랐다. 늘 동시에 열 개씩 울리던 생각이 하나씩 간격을 두고 들어왔다. 윙윙,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돌고 돌던 엔진이 이제는 제 속도를 찾아가는 듯한 느낌. 항상 구름이 가득 끼고 천둥번개가 치던 머릿속이 점점 맑아지는 느낌이다. 다른 사람들은 내내 이런 삶을 살고 있었다니 세상에 배신당한 느낌이다. 내 머릿속은 항상 여러 개의 채널이 돌아가고 있었는데, 한 가지 채널만 보고 산다는 건 이렇게 깔끔한 거구나.
약을 먹어서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건 생각도 못했다. 정신과에 가볼 생각도 물론 못 했었지만, 그동안 평생 나 스스로의 의지와 정신머리를 탓하며 자책하던 게 마치 감기처럼 약으로 해결되는 일이었다니. 처음 약을 받아오고 나서도 무서워 며칠 동안 봉지만 바라보던 게 무색할 정도로, 약 몇 알로 서른셋 인생이 변화한 게 그저 신기하기도, 억울하기도 했다.
집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거실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수건 한 장이었다.
연보라색 수건.
백일 때 만들어 놓고, 누구에게도 주지 못했던 그 수건들. 여전히 집 안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서랍을 열었다. 욕실 선반, 다용도실, 아이 옷장까지. 어디든, 그날이 있었다.
나는 커다란 비닐봉지를 꺼내 하나씩 담았다. 새벽마다 잠 못 들 던 나, 새카맣게 그을었던 주방, 코 끝에 남아있던 진한 탄 냄새, 펑 터져버린 에어백, 핸들 옆에 널브러져 있던 핸드폰, 그칠 줄 모르던 아이의 울음소리. 그 모든 장면들이 접힌 연보라색 수건 안에 눌어붙어 있었다. 비닐봉지를 묶어 쓰레기장에 내놓고 돌아와 소파에 앉아 쿠팡 앱을 열었다.
‘호텔 수건 20장 세트. 화이트’
로켓배송으로 내일 아침이면 도착한다고 한다. 주문하기 버튼을 누르면서, 나는 아주 작게 웃었다. 새 수건이 오면, 도현이 얼굴을 제일 먼저 닦아줘야지. 이제는 내 손길이 조금 더 부드러웠으면 좋겠다.
* 이 이야기는 상상으로 써낸 단편소설입니다. 7장이 마지막 장으로 완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