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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hnny Kim Apr 30. 2022

스물일곱, 국도를 달리다

이 모든 것들이 시작되었던 것은 여행이었다

무작정 여행을 떠나기 시작했던 건 열아홉 살 때였다. 왠지 햇살이 달큰하게 쏟아지던 날 아침, 그냥 제주도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공항에 가는 길에 대충 예약한 게스트하우스에서 3박쯤 묵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스무 살에는 모은 돈을 들고, 직접 찍은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어 팔며 100일여 동안 동남아 5개 나라를 여행했다. 그 뒤엔 베트남 시장 좌판에서 국수를 먹고, 코타키나발루의 끝내주는 석양을 보기도 했고, 시카고에서 한 두달쯤 살아보기도 했었다. 유럽이나 호주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꽤나 돌아다닐 만큼은 다녔던 것도 같다.


어쩌면 내 여행 기록에 있어 가장 밀도가 높았던 건, 2020이 아니었을까 한다. 3년차 직장인으로 안정적인 돈을 벌고 있었고, 함께하는 사람도 있었으며, 심지어 그이는 시간이 참 많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2020은 행복한 개인의 삶에 모든 것의 초점이 맞춰져 있던 해였다. 굵직한 3박짜리 국내여행만 세 군데에 미국까지 다녀왔었다. 


이듬해인 2021은 개인사업의 매출을 늘리는 것에 삶의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아쉬운 계기로 혼자가 되었고, 그런 김에 손에 쥐는 돈이 늘면 비례해서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수준까지는 틀린 말도 아니었다. 뚜껑이 열리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녔고, 장을 볼 때 영수증도 가격도 신경쓰지 않았다. 원가도 관리비용도, 지급할 인건비도 없는 지식노동 1인기업가의 삶은 매출의 입장에서만 보면 퍽 괜찮았다. 풍요로웠다. 물질적 풍요가 주는 어설픈 안정은 처음엔 꽤나 달콤했다.


그런데, 뚜껑 열리는 스포츠카는 바삐 출장 다니느라 일할 때만 탈 수 있었고, 여행은 다니지 못했다. 그저 사무실이라고 이름붙인 거실에 틀어박혀, 밤이고 낮이고 일을 하는 기계로 살았다. 작년엔 여행이라고는 클라이언트를 만나러 의정부와 강남, 부천을 돌아다닌 것, 그리고 이제는 집앞이 된 월미도가 전부였다.



죠니 킴의 국도여행


그런 내가, 다시 여행을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이 시작된, 내가 지나온 궤적의 시작점이 여행이었다는 걸 상기해서일까, 꼬부랑 고갯길을 달릴 때 재미있는 차로 바꿔타서일까, 아니면, 새해부터 다시 직장인이 되어 주말이 소중해져셔일까. 그냥 아이패드로 지도를 펼쳐들고, 네비게이션의 도움 없이, 한없이 길을 달리고 싶었다.


주말마다 여행을 떠난 건, 이번이 3주째다. 3주 연속이다. 처음엔 남한강을 따라 광주-양평-가평-설악을 다녀왔고, 둘째 주엔 밤 늦게 도착한 속초에서 1박을 하고 미시령-인제-양양-강릉을 돌아 집에 왔다. 그리고 지금은 단양-충주-문경을 거쳐 안동에 와 있다.


여행의 규칙은 두 개다. 첫 목적지까지 가는 길과 집에 오는 길을 제외하고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지 않기, 그리고 내비게이션 쓰지 않고 중간중간 멈춰서 지도 보며 다니기. 목적지에 다다르는 효율이 아니라, 과정이 곧 목표가 되는 여행이랄까. 국도를 달리다가 굽이굽이 오르내리는 산길이 보이면 괜히 그리로 차를 돌리고, 적당한 밥시간에 마주치는 식당을 아무데나 골라 들어가고, 경치 좋은 곳이 보이면 그냥 멈춰서 풍경을 바라보는 어찌보면 이상한 여행을 즐기고 있다. 출발하기 전에 정하는 것은 묵을 숙소, 딱 하나다. 


양양까지 가서 밥을 먹겠다 다짐하고 달리다 도중에 막국수집 다섯개를 지나치고, 결국 참지 못하고 여섯번째 막국수집에 들어가 밥을 먹는다든지(아, 참아야만 했던 그 집 막걸리가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달리다 보니 비포장도로가 튀어나와서 오프로드 랠리카 드라이버 체험을 한다든지. 


무계획이 계획이며, 무계획이 만드는 우연에 나를 한껏 내던져보는 것. 그리고 우연이 주는 감동을 한껏 누려보는 것. 우연이 주는 크고 작은 문제를 해결하며, 유연하게 대처해보는 것. 어쩌면 마음과 지갑과 경험치가 모여야만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그런 어려운 여행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이든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생겨서, 될 대로 되라고 하는 것일 수도. 


편안은 누려도 평안은 없을 것만 같았던 나에게 평안이 찾아왔고, 안정이라면 재미없다고 생각했던 나에게 안정적인 것이 맛깔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마음이 평안하고, 불안하거나 조급하지 않아서, 모든 것이 순조롭고 부드럽게 느껴진다. 사실, 홀수의 해에 무언가가 있나 싶은 생각도 든다. 



    우울증과 무기력증의 끝에서, 자퇴를 결심한 열여덟

내가 사회에서는 퍽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발견한 열아홉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엽서여행, 스물

제주도로 이사를 떠났던 스물하나 https://brunch.co.kr/@johny1140/34

    잡힐 듯했던 모든 것들이 잡히지 않았던 스물둘 https://brunch.co.kr/@johny1140/81

첫 사업을 시작했던 스물셋 https://brunch.co.kr/@johny1140/106

    이리저리 깨지고 치이고, 고독했던 스물넷 (이 땐 글도 잘 쓰지 않았었나 보다)

어느 때보다 많이 사랑받았던 스물다섯 (여전히 이 시간이 퍽 그리운 면도 있다)

    풍요했으나, 생각만큼 행복하지 않았던 스물여섯

그리고 지금 살아가는 올해, 스물일곱. 



스물일곱의 수식어는, All New & All Better라고 붙이고 싶다. 직장이 바뀌었고, 차도 바뀌었고, 새로운 취미가 시작됐고, 다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으며, 주변 사람들도 우르르 나가고,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평안하고, 행복하며, 회복탄력성으로 가득한 시간을 누리고 있다. 우울증과 드디어 아디오스를 외치게 되었고, 어쩌면, 가족이 될 사람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묘한 직감도 있다.


2022는 나에게 새로운 챕터 그 자체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시간이 많이 지나도 바뀌지 않아야 하는 것들도 있다.


아마도 나에겐,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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