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과 선에서 사는 사람과 삼차원의 그대들
: 세부 공간 구성과 굿즈/소품
팝업은 생각 이상으로 챙길 것들이 많다. 특히 굿즈, 소품의 대부분을 사내수공업(이라고 쓰고 킹 받아서 킹내수공업이라 읽는다.)으로 쳐낸다면 수많은 피, 땀, 눈물, 그리고 체력과 기억력이 필요하다. 후반부에는 비용부터, 공간 디자인, 소품, 굿즈, 타 팀과의 협업, 협력사 소통 등등 관리할 사항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지기에 기억력을 잠시 잃으면, 업무에 차질이 생긴다. 그래서 체력은 뚝뚝 떨어지고, 언제나 예민해져 있다.
_ 는 내 이야기다.
이미 완연한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부분은 <공간>이었다. 우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철저히 점과 선에서 사는 사람, 즉 공간 지각력이라고는 아예 없는 ‘2차원의 인간’이다. 어찌어찌 공간 기획을 하긴 했는데, 공간의 감도 잡히지 않고, 방을 꾸미는 거라면 엽서 붙이는 게 전부인 사람이라 세부 공간 구성은 가시밭길 같았다.
팝업 스토어는 ‘보여주는 공간’이기 때문에 ‘우리 트렌디해요!’라고 외칠 수 없고, 그걸 언뜻언뜻 보여줘야 한다. 그것이 글을 주로 다루는 나에게는 너무 고역이었고, 평소엔 접속하지도 않는 ‘오늘의 집’을 그렇게 들락날락거렸다고 한다…
이 때 우리 무적의 디자이너분들이 공간을 일으켜 세워 주셨다. 평소에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공간 디자이너분과 트렌디한 패키지 디자이너, 세심한 브랜드 디자이너분들이 레퍼런스를 뚝딱뚝딱 가져와서 대화하다 보니 공간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포스터를 직접 가져오기도 하고, 새로운 소품을 제안하기도 했다. 목공이니, 가벽이니, 도장이니 알 수 없는 이야기들로 가득했지만, 나와 달리 3차원에 사는 천재들 덕분에 팝업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마치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은 느낌이었는데 말이다.
굿즈는 내부에서 해결했다. 모든 시안을 내부에서 디자인하여 제작을 맡기는 방식이었다. (그렇게 굿즈 업체 관리를 맡은 디자이너님은 머리가 터지게 되고…) 무무씨와 갓생기획 굿즈 이렇게 크게 두 갈래로 나누어서 자체 굿즈 공장을 차렸다. 우선 제안할 수 있는 모든 굿즈를 협업툴에 몽땅 적고, 현실적인 문제(기간, 비용, 공수 등등)를 고려해서 실제로 구성할 굿즈(판매용/배포용/DP용)를 리스트업했다. 살면서 굿즈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이때 디자이너 분들 어깨 너머로 굿즈 디자인 과정, 최소 발주 수량 등등을 알게 되었다. 팝업스토어를 하면 평소에는 접하지 못했던 업무들을 새롭게 접할 기회가 많이 생긴다. 당시에는 참 고단했지만, 내 평소 업무 범위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아니라 돌이켜 보면 소중했다. (좀 시간을 오래 두고 돌이켜 봐야 한다)
콜라보 작가 ‘아무개씨’도 섭외했다. 아무개씨는 예전에 친구 따라 들른 팝업 스토어에서 접한 일러스트 작가인데 특유의 촌스러움이 사랑스러웠다. 그 매력에 푹 빠져 홀린 듯이 귀여운 수제 키링도 만들었다. 내 소심한 좌우명 ‘내탓이냐’가 쓰여진 귀여운 키링. (스투키에도 ‘내타시냐’라는 이름을 지어서 키우고 있다) 그런데 브랜드 디자이너분이 마침 딱 ‘아무개씨’ 컨택이 가능하다고 제안하시는 게 아닌가! 수줍은 팬심으로 적극 찬성했고, 미팅 후 굿즈를 진행했다. 우리의 키 컨셉 ‘이 또한 갓생’과 결이 잘 맞는 분이라 기대보다 더 찰떡인 키 비주얼을 잡아 주셨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도무송 스티커 작업이었다. ‘요즘 팝업’에 빠질 수 없는 게 바로 도무송 스티커 아닌가! 도무송 스티커는 주로 노트북 같은 데 붙이는 모양 스티커인데, 그 스티커는 익숙해도 용어 자체는 처음 들었다. (‘톰슨’ 가공법이라는 인쇄 용어가 일본식 발음으로 변형되어 ‘도무송’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tmi) 스티커 작업은 나를 포함한 디자인팀 전체가 참여했다. 주제는 ‘이 또한 갓생’. 처음에는 번거로울 것 같아 관련 문구를 몇 개 제안 드렸는데, 다들 더 엄청난 아이디어로 너무 재미있게 만들어주셨다. 나도 구린 실력으로 아이패드에 몇 개 끄적였다. 다행히 요즘은 발로 그린 그림체도 충분히 사랑받는 좋은 세상이라 2개 정도는 ‘프로듀스티커101’의 최종 라인업으로 선발될 수 있었다 ^^^^ 이 도무송 스티커는 ‘행복한 탕비실’에서 인스타 팔로우를 하면 나눠주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갓생기획 구성원들과 다양한 의견을 나눈 후, 큼직큼직한 소품은 대체로 정해져 협력사에서 마련해주셨다. 책상, 스케이트 보드, 턴테이블, 소파 등등. 그런데 채우면 채울수록 계속 부족해 보였다. 미니멀리즘? 몰라, 그런 거 안 배웠어.
즉각적으로 생각나는 소품들을 리스트업하고 구하는 나날을 보냈다. 이러다가 당일까지 소품 구하는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종종 했고, 말이 씨가 된다 했나… 퉤퉤 했었어야 했는데…
1) 책
네넵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의 일부는 책을 통해 말하기로 했다. 네넵이의 캐릭터를 구체적으로 세운 덕에 ‘네넵이라면 이런 책을 보고, 이런 걸 했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가 금방 나왔다. 사무실에는 업무 관련 책을 뒀고, 서랍 속에 <김부장을 누가 죽였나>라는 책도 숨겨 두었다 ㅎㅎ 네넵이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할 사람도 아니고, 나 역시 실제로 죽이고 싶은 누군가를 마주한 적은 없지만, 고객들 중 누군가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ㅠ원만한 합의하시길…) 방에는 네넵이의 꿈을 담았다. 생각만 하는 사이드 프로젝트, 벼락부자의 꿈,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 네넵이라면 이걸 읽었겠다 싶은 책들. 다들 그런 책을 귀신같이 찾아서 리스트업해 주었다.
2) 복권 낙첨 용지
디테일한 소품 중 하나가 구겨진 복권 용지인데, 고객들이 많은 공감을 해주었다. 네넵이의 책상이 뭔가 심심하지 않을까 하는 찰나에 전 직장 동료들이 생각 났다. 나의 네넵 시절을 보낸 전 직장에는 매주 복권을 사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언제나 일확천금의 꿈을 꿨다. 금요일 퇴근 때마다 ‘다음 주에 나를 찾지 말라’고 했지만, 월요일 아침에 꼬박꼬박 모닝커피를 마시며 그 자리를 지키던 친구들. 비록 나는 놀랍게도 복권을 사 본 적이 없지만, 네넵이라면 그 친구들처럼 한 주에 한 번은 꼬박꼬박 사고 설레했을 것 같아 낙첨된 복권 용지를 모았다. 팝업 구성원들이 십시일반 모아 주셨고, 당연히 당첨되면 안 주셔도 된다 했지만 모두 정시 출근해서 자리에 가져다주셨다.
3) 그 외 소품 (버킷리스트, 큐브)
그 외의 소품 중 몇 개는 배우 김태리 브이라이브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나는 드라마 덕후이기 때문에 그즈음 끝난 <스물다섯 스물하나>도 당연히 보고, 슬퍼했다. 배기진,……외않되?ㅠㅠㅠ 드라마를 보면서 배우 김태리의 귀여운 씩씩함이 마음에 들어 이것저것 찾아보다가, 그녀가 연초마다 한 해의 버킷리스트 빙고 판을 만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 하나 뜯어보면 ‘다리 찢기’ 같이 소소한 목표인데 그런 것들을 버킷리스트 빙고판에 쓴다는 게 너무 귀여웠다. 이런 건 당연히 못 참기 때문에 늦었지만…나도 해봤고, 네넵이네 방에도 붙여 두었다. 소소하지만 현실적이고, 그런데 은근히 지키기 힘든 것들. 동그라미를 쳤다가 엑스자를 다시 치는 아가리갓생러 면모도 보여주었다.
큐브도 마찬가지이다. 배우 김태리 브이라이브에서 그녀가 힘들 때마다 소소한 취미를 즐기거나 작은 성취를 하며, 효능감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따라 했었다. 그녀가 말하길 큐브도 삐걱삐걱 유튜브 보면서 맞추다 보면 어느새 완성된다고 했다. 유튜브로 큐브를 맞춘다고? 의심스러웠지만 왠지 모르게 그녀가 말하니 믿음이 가는 게 아닌가. 다음 날 다이소에서 2천 원짜리 큐브를 사서 해보았고, 삐걱삐걱 맞추다 보니 이게 정말 되는 것이다! 큐브는 천재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작은 성취가 몹시도 필요했던 팝업 준비 기간 동안 무수히 맞춰 지금은 큐브 왕이 되었다!)
네넵이도 작은 성취가 필요하겠다 싶어 하나 놔 주었다. 열정을 잃어 뭐 하나 꾸준히 하지 못한 채 취미 부자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게다가 트렌드레터 캐릿에서 실제로 큐브가 알파세대 (2010년 이후 출생자)에게도 인기라 하니 못 참지! (그런데 팝업 중 큐브를 자꾸 맞춰서 올려두는 큐트한 큐브 빌런들이 있었다. 언젠가 한데 모아 큐브 대결을 한번 해야겠다.)
생각보다 아이디어는 알 수 없는 곳에서 튀어 나온다. 특히 팝업처럼 모든 분야가 열려있는 프로젝트에서는 더욱더. 배우 김태리 님에게 수줍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 프로젝트 후 작성한 개인 후기입니다.
* 기획 과정/관련 작업 사항을 가볍게 다루며, 그 때의 상황 위주로 작성하는 일기 형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