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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Oct 21. 2021

이것 또한 추억.

친정집 벽에 걸린 여러 사진들 중 여름날 수목원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있다. 지금 봐도 어색하고 이상한 머리를 하고 있는 사진 속 나를 볼 적마다 사진을 다시 한번 보게 된다. 또, 분명 그곳은 아침고요 수목원이라는 걸 알지만 수목원보다 다른 기억이 더 선명하게 기억난다. 




2002년 여름 많이 아팠다. 

항암치료가 끝난 후 내 머리카락도 많이 자라 내 이마를 살짝 덮을 수 있을 때가 되자 밖은 다시 더운 여름이었고, 2003년이었다.      

내 치료가 끝났지만 집안에 이미 자리 잡은 우울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아빠의 제안으로 온 가족이 여름 여행을 가기로 했다.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회복이 되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너무 많은 곳은 나 자신이 위축되어 좋아하는 바다를 포기하고 조용한 산이나 계곡으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거리상 너무 멀지 않고 조용한 휴양을 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은 가평의 아침고요 수목원이었다. 정확한 목적지가 결정되자 숙소는 우리 세 자매가 그 근처로 예약을 완료했다.     


조용한 산과 계곡이 있는 가평으로 가는 여름날. 

바로 일 년 전 여름날 잘 보이지 않았던 여름의 싱그러움이 한눈에 보였고, 빼곡한 나무들이 하늘을 다 가릴 것 만 같았다.      


싱그러운 여름을 감상하며 숙소를 찾아가던 길.

내비게이션이 지금처럼 잘 되어있지 않아 지도로도 확인하며 숙소를 향해 운전하던 아빠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불안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셨다.     

시골 마을길처럼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 보니 밭들이 잔뜩 있고, 하천이 졸졸 흐르고 있으며, 높지 않은 언덕배기에 원목으로 지어진 펜션이 3채 보였다.

큰 펜션도 아니었고, 1층 단층짜리 펜션이 30센티 정도 되는 나무 울타리로 구분 지어 3채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근처 보이는 집이라곤 그 펜션밖에 보이지 않았기에 차 창밖을 보며 다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설마 저곳?"  


펜션에 가까워질수록 나 역시 놀랐다.     

오 마이 갓! 설마 설마 이곳이야믿을 수 없어..      

여행의 기대가 실망으로 그리고 완전한 절망으로 변했다.


8명도 충분하다는 펜션은 화장실만 분리된 원룸형이었고, 8명은 커녕 우리 식구 딱 5명이 누우면 꽉 차는 방이었다. 심지어 신축이라고 했지만 에어컨이 아닌 선풍기가 달려 있었다.

그리고 계곡 뷰라고 했는데 펜션 앞에서 바로 보이는 건 밭뿐. 계곡이라고 하기엔 많이 부족한 하천은 밭 아래 우리가 들어올 적에 보았던 하천이 다였다.     


홈페이지에 쓰인 문구대로 된 것은 딱 하나 있었다.

신축! 정말 이제 새롭게 밭 위에 원목 펜션을 세운 것 그뿐이었다.     


나는 홈페이지를 보고 상상했던 모습과는 너무 달라 주인아저씨에게 재차 확인했다.

하지만 그분은 허허 웃으며 아주 능청스럽게 말했다.

"보다시피 당연히 신축이고 조용하고 5명은 누울 수 있죠! 가족분들이 너무 넉넉한 사이즈를 생각하셨네. 그리고 주변이 산과 밭으로 둘러싸여 있어 선풍기로도 충분해요. 계곡은 밭 아래로 내려가면 보이는 곳이며 이용할 수 있죠! 홈페이지 대로죠. 이 가격에 이런 펜션 없죠."     


© withluke, 출처 Unsplash


옆에서 듣고 있던 부모님은 어이없는 미소만 얼굴에 있을 뿐 능청스러운 주인아저씨에게 화를 내봤자, 그리고 이왕 놀러 왔는데 다시 돌아갈 수도 없기에 이의 제기는 빨리 접고 받아들이기로 하셨다.     

부모님은 짐을 풀고 저녁 식사를 준비하셨고 우리 세 자매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펜션 주변을 서성이며 화를 식히는 것인지 부모님 눈치를 봐야 하는 건지 이 상황이 너무 억울해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런 우리를 보고 엄마는 이왕 놀러 온 거 재미있게 놀다 가면 다 추억이 된다고 하셨다.


그 말씀이 맞았다.

이 상황을 다시 되돌릴 수도 없는데 인정하고 이 상황에서 남은 여행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가 더 중요한 것이었다. 남은 여행을 엉망으로 만들 순 없으니 말이다.     

결국 우리는 펜션에 실망감은 잊고 화기애애하게 맛있는 바비큐를 먹으며 웃고 떠들었다.


밭 뷰에 주변 민가도 없어서 그런지 우리의 웃음소리 외 들리는 거라곤 개구리 소리뿐이었다. 조용한 분위기 속 우리만 있다는 사실은 더없이 좋긴 했다.     


바비큐가 끝날 즘 아빠는 말씀하셨다.

"이번에 너희가 처음으로 알아보고 여행 온 건데, 생각보다 실망이 컸지. 세상이 이렇다. 기대한 것보다 밖은 더 실망스러울 때가 많아. 그래도 어쩌겠어.  다음번에는 이런 실수 안 하도록 잘 결정하면 되는 거지. 여기 펜션 덕분에 아빠는 군대 훈련 나온 기분도 난다. 가평에 아직 이런 곳이 있었네."     


저녁은 맛있게 먹고 한결 편한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웠지만, 원룸에 다섯 식구가 선풍기 한 대로 밤을 보내기엔 너무 더운 여름밤이었다.

이날 더워서 자고 깨고를 반복하다, 다음날 빠른 퇴실을 하고 수목원으로 갔다.      


내게 가평은 싱그러운 여름을 뽐내던 곳이자, 내 여행의 첫 실수가 기억나는 곳이다. 

나로 인해 온 가족이 함께 투병 생활을 했고, 회복한 나와 고생한 가족 모두를 위한 여행을 내 잘못된 결정으로 온 가족이 하룻밤을 어렵게 보냈으니 말이다.      




하지만 실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된 추억이다. 

언제 우리 다섯 식구가 좁은 원룸에서 옹기종기 모여 잘 기회가 있었겠나.

대신 시간이 약으로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또, 많은 여행지 중 실수로 기억되는 곳 하나쯤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너그러운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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