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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Oct 14. 2021

할아버지와 자유로.

구 남자 친구이자 지금의 남편에게 자동차 연수를 시켜주던 때였다.

시내 운전 말고 뻥 뚫린 고속도로 운전을 연습하기로 한 날 내가 선택한 곳은 자유로였다.

자유로는 행주대교 북단에서 파주시 문산읍 자유의 다리에 이르는 고속화도로이자 내가 어릴 적 자주 다녔던 고속도로였기 때문이다.      


자유로로 출발하면서 나는 어릴 적 자주 다녔던 길이라고 그에게 말하자 그는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자유로를 자주 다닌 이유를 유추해 보자면 통일 전망대가 제일 먼저 떠오르기에 그는 내게 통일전망대 때문이냐고 물었다.      

나 역시 그와 비슷한 질문을 할아버지에게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90년대 초반 전남 회진에서 부천까지 차로는 편도 8시간 정도 걸렸다. 하지만 할아버지 할머니는 그 먼 길을 자주 올라오시곤 했다.

약 10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 가족이 부천으로 분가했기 때문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그 빈자리의 허전함에 그 먼 길을 힘들어도 우리를 보러 오시곤 했다.

나로서는 매우 반가웠으며, 할아버지 할머니가 부천으로 오셔서 함께 살아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할아버지 할머니의 삶의 모든 게 시골에 있었기에 그렇게 올라오시기엔 많은 걸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대신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2-3개월 주기로 다녀가시곤 했다.     


부천에 오시면 할아버지 할머니는 서울 큰집도 들리시고 병원도 가시고, 쇼핑도 하며 시골에서 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를 하셨다. 특히 주말이 되면 우리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이곳저곳 관광을 많이 다녔다. 그중 사진으로도 제일 많이 남아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자유로 다.


처음에는 나도 이곳에 가면 좋았다.

다른 곳과 달리 우리 집에서 몇 시간 가지 않아도 넓은 도로가 뻥 뚫려 있었고, 차도 많지 않았다.

자유로 중간 휴게소에서 아주 먼 길 여행도 아니지만 여행하는 기분을 내며 간식을 마음껏 사 먹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린 내가 느끼기에도 너무 자주 자유로를 다녔기에 한 번은 할아버지에게 여쭤보았다.

“할아버지, 우리가 혹시 북한에서 내려왔어요?”

할아버지는 내가 엉뚱하다는 듯 쳐다보고 웃으시며 대답하셨다.

“아니, 왜?”     


나는 이해가 안 돼서 대답했다.

“할아버지는 다른 곳을 가도 되는데 왜 이곳에 자주 오자고 해요? 혹시 우리 친척이 북한에 있어요?”

아무렇지 않게 할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아니. 할아버지는 우리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우리 친척도 다 그곳에 있지. 북한에는 전혀 연고가 없어. 근데 이곳에 오면 다른 도로보다 넓고 뻥 뚫려 있잖아. 그리고 너희 집에서 이곳을 다녀가기도 편하고 할아버지는 그냥 이곳에 오면 좋아. ㅎㅎㅎ”     


난 할아버지의 깊은 의미가 있는 곳인 줄 알고 심각하게 여쭌 거였는데 그게 아니었다.

할아버지는 뻥 뚫린 길이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우리 집에서 짧은 시간 안에 여행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아직도 그 답을 찾지 못했다.      




이후 할아버지 할머니와 이곳저곳을 함께 여행했지만, 유독 자유로가 기억에 남는다.

아마도 무뚝뚝한 할아버지의 여행지 리스트에 왜 자유로가 포함되어 있을까 심각하게 고민했던 어린 내가 떠올라서일까.      


김신지 작가의 <평일도 인생이니까> 책에 이런 말이 있다.


요즘 내게 중요한 것은 이런 것이다.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 이미 읽은 책을 한 번 더 읽는 시간. 여러 곳에 가는 것보다 한 장소에 제대로 머무르는 일.
거기 좋았잖아, 또 가보자,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좋다.


할아버지도 이런 의미로 자유로를 가자고 하신 거 아니었을까.


지금도 파주 가는 길 할아버지와 함께 다녔던 자유로와 이 대화가 항상 떠오른다.     

특별한 여행의 슬픔이나 기쁨이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할아버지가 좋아했던 장소에서 할아버지와 심각하게 대화했던 내가 생각나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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