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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Oct 19. 2021

한 겨울, 대성리.

신선한 차가운 공기가 내 가슴속을 꽉 채워줄 때 

그 찬 공기가 오히려 내 가슴을 뜨겁게 달궈줬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 공기만큼 차가웠던 그곳을 잊을 수 없다. 

 

2002년 항암치료가 끝나고 내게 남은 것은 휑한 두피에 끈질기게 뿌리내리고 있는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들과 예전 같지 않은 컨디션이었다. 

이제 환자의 일상을 벗어던지고 원래의 나로 돌아가야만 했다. 

짧았지만 어려운 미로의 끝에 도착했지만 미로의 출구로 가지 못하고 있었고, 초라한 내 모습에 움츠렸고, 밖은 추운 겨울이었다.   

   

날 오랫동안 봐온 친구들은 지금의 내 모습은 원래의 내 모습이 아닌 걸 알기에 날 위로해줬고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내게 손 내밀어줬다.

내밀어준 손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나 역시 그 손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움츠려 든 내 마음은 겁이 났고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자르지도 못하고 가리고만 싶었다. 그래서 친구들의 염려에도 외출이나 그 외 활동에 신중했던 것 같다. 


평소 모자를 싫어했던 내가 외출을 위해 제일 필요한 건 패딩도 아닌 겨울 모자였다. 

엄마 역시 이런 나를 알기에 어느 날 내게 무심하게 모자를 사 주셨다. 

모자 달린 점퍼나 후드티가 아닌 모자만으로 그것도 겨울용 모자를 쓰는 건 어린 시절 이후 처음이었다. 

어색하게 쓴 모자가 내 민둥산 같은 머리를 숨겨줬고 몇 가닥 남은 머리카락이 길게 내려와 오히려 어울린다는 자신감을 갖게 해 줬다. 


모자 덕분에 자신감이 생긴 나는 겨울 여행을 가자는 친구들의 제안에 동의했다. 

또, 그들은 모처럼 외출하는 내게 어디를 가고 싶냐고 물었다. 

사실 나는 병원과 집이 아닌 곳을 간다는 사실이 중요했지 특별한 목적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대신, 차가운 겨울 공기에 그동안 내 몸에 배어 있던 약 냄새와 병원 냄새들을 몽땅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떠난 곳은 대성리였고, 2002년 12월 30일이었다.

연말 분위기 내기 딱 좋은 때이자 화려한 야경을 구경할 수 있는 건 도시였지만 난 친구들과 함께 조용하다 못해 차가운 공기만 흐르는 곳을 물색하다 대성리에 갔다. 

평소 기차 타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조차 겁이 났던 때였고, 처음으로 나 스스로 멀리 가기로 결정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대화를 나누며 웃고 떠들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내가 치료를 끝낸 후 첫 여행을 갔다는 사실과 초라해진 내 머리카락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된 겨울 모자 덕분에 당당하게 친구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하루 종일 아무 문제없이 기차 여행을 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기억뿐이다.      


대신 사진이 그날의 행적을 기억하고 있다.

나 역시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며 이렇게 돌아다녔나 짐작만 할 뿐이다.      



하지만 매섭게 불던 겨울바람과 사람이 없어서 고요했던 대성리 분위기는 기억난다. 

겨울 아닌 계절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붐볐을 대성리를 나는 왜 가고 싶었던 것일까. 

시끌벅적하고 사람들로 생기 가득했던 장소가 조용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생기를 잃은 내 모습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그 조용한 대성리에서 조용히 걸으며 숨을 내뱉을 때마다 내 안에 쌓인 병원 냄새들이 사라지고, 들숨으로 아무 냄새 없는 차가운 공기가 내 가슴 곳곳을 채워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아무도 없고 휑한 이곳을 나와 함께 겨울 여행을 해준 친구들에게 사무치게 고맙고 또 고마웠다. 

그들과 함께해 마음 편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내게 그 겨울 여행은 충분했다.     

 

여행이 꼭 어디를 보고 먹고 즐겨야만 하는 것 아닌 것 같다. 

그해 겨울 대성리 여행은 여행이라기엔 짧은 반나절 외출이었을지 모르지만 그때 내 기분은 평생 어느 여행보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마음은 무거운 짐을 벗은 듯 홀가분하고 따뜻했던 여행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어디를 가든, 그곳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여행은 충분히 완성된 것 아닐까. 

차가웠던 겨울 대성리가 아니었더라도 기억에 남았을 겨울 여행이었다. 

짧지만 어려웠던 미로의 끝에서 코앞에 있던 출구를 향해 한걸음 걸어 나가게 해 줬다. 


대성리는 그 짧은 여행 한 번으로 인해

나의 무겁고 우울했던 마음을 정화시켜준 곳으로 기억되는 아주 순수한 곳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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