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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Oct 20. 2021

계획적인 버스 여행

차선의 여행법

나의 단짝 친구는 치밀한 계획파 여행자다.

친구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다음 날은 무조건 쉬어야 할 정도로 빠듯한 계획 여행이기에 힘들기는 하지만 풍부한 볼거리를 감상한 후에는 친구에게 박수를 쳐 주고 싶을 정도다.     

그렇게 한번 여행을 다녀오면 한동안 친구를 만나지 않는다.

너무 타이트한 여행으로 지쳐버려 친구를 만날 생각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 친구가 내게 관광버스 여행을 제안했다.

마치 남이 해준 밥이 제일 맛있는 것처럼, 남이 세운 계획대로 여행을 맡기고 싶을 때 친구가 선택하는 차선의 여행법이다.

버스 여행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친구가 현실에 한참 지쳐있고 계획을 세울 틈조차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버스 여행은 전혀 느슨하지 않다.

     

여행 전날 밤 아주 간단히 여행 가방을 챙겨 놓고 다음날 새벽 전철 첫 차를 타고 출발했다.

오랜만에 탄 전철은 매우 어색했고, 한때 전날 야근하고 다음 날 새벽 첫차를 타고 출근했던 30대 초반 지옥 같았던 출퇴근길을 떠올리며 그때와 같은 첫 차 분위기는 무척 다르게 느껴졌다. 오직 여행을 위해 첫 차를 탔다는 색다른 기분에 한결 들뜬 기분을 즐겼다.      


드디어 도착한 서울시청.

완벽히 까만 하늘이 아닌 이제 막 해가 빛을 내기 시작한 어슴푸레한 새벽. 부지런히 먼저 대기하고 있는 관광버스 몇 대를 보고  친구에게 차 번호를 확인하고 버스에 탑승했다.     

친구를 만나 야반도주하는 여행 같다고 들뜬 기분으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우리의 수다는 마지막으로 인원 체크를 하고 출발하겠다는 인솔자의 말에 멈췄다.      

버스는 여행 포기자 한 명 없는 부지런한 여행자들을 데리고 서울을 빠져나가기 위해 서둘러 출발했고, 드디어 우리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출발 전 신나게 떠들었다면, 버스가 출발하자 모두 조용히 잠을 청했다.

서둘러 나오느라 피곤했을 터 체력을 충전하기 위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조용해졌고, 이내 쌔근쌔근 숨 쉬는 소리 또는 간혹 코 고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참을 달려 이곳이 어딘가 싶을 때, 우리의 인솔자는 마이크 테스트를 하며 우리의 단잠을 깨웠다. 그리고 휴게소에 들러 잠깐의 쉬는 시간을 보냈다.

이른 새벽에 출발한 우리는 휴게소의 아침 모습을 볼 수 있고 잠깐 쉬는 시간인 이때 꼭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도 들리고, 의자에서 잠들어 굳어있던 몸도 스트레칭으로 풀어줬다.     


휴게소에서 탑승 인원을 체크한 후 다시 출발한 버스 안에서는 방금 전 조용했던 수면 분위기와 달리 부족했던 잠을 채워서인지 아주 쌩쌩한 컨디션으로 버스 안은 시끌벅적해진다.      


어느 순간 인솔자의 첫 번째 목적지 도착을 알리는 안내 멘트와 함께 우리는 도착했다.

이번 여행의 첫 목적지는 고성의 라벤더 팜이었다.

이곳은 외국 라벤더 농장 같은 느낌이었다.


구름은 잔뜩 껴 흐리지만 햇살이 간간이 비춰주었고, 강원도 공기를 한껏 마시고 자란 싱싱한 라벤더의 보랏빛은 선명하고 향기롭게 눈에 들어왔다.

너무 아름다운 라벤더 풍경에 빠져 멈추는 곳마다 사진을 찍으며 라벤더 농장을 한 바퀴 돌고 기념품 가게에서 아기자기한 상품도 구경하고 라벤더가 들어간 빵, 아이스크림 등등을 맛보며 아침 내내 첫 여행지의 매력에 푹 빠졌다.      



라벤더 맛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색은 이쁘다.



한참을 웃고 떠들며 잔뜩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버스에 탑승했다.

이제 버스가 두 번째 목적지를 향해 출발했다.      

금세 도착한 두 번째 장소는 속초 중앙시장이었고, 이곳에서 점심 및 자유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속초 물회를 점심으로 먹었고, 시장 이곳저곳 구경하고 간식도 사 먹으며 시간을 보내다 혹여나 버스 탑승 시간을 놓칠까 빨리 약속한 장소로 버스를 타기 위해 갔다.      


속초 청초호


다시 출발한 버스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여행지 외옹치해수욕장으로 갔다.

이곳은 간첩 사건으로 한동안 통행금지 및 비공개 장소였으나 다시 민간인에게 공개된 둘레길도 있었다.

해변을 따라 크게 둘레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고, 우리는 배부른 배를 소화시키며 속초의 바람맞으며 시원한 파도 소리는 들으며 멋진 바다 풍경을 눈으로 담고 다리로 걸으며 한껏 시간을 즐겼다.      


외옹치해수욕장


다시 탑승한 버스는 드디어 서울로 출발했다.

역시나 가는 길 중간 휴게소에 한 번 들렀고 오후 8시쯤 서울에 도착했다.      

12시간이 넘는 버스 여행이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새벽에 출발했을 때처럼 새근새근 잠자는 소리만 들렸고, 나 역시 그랬다.

하지만 버스 좌석이 우등이 아닌 일반석이라 자리가 좁아 피로가 없는 건 아니었다.

서울 도착 후 친구와 회포를 풀 사이도 없이 우린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학창 시절 수학여행의 1일 차 여행 같다고 해야 할까. 버스 한 대당 선생님이 인솔하며 기사님은 정해진 관광코스대로 내려주고 식사하고 내려주고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동 수단에 대한 걱정 없이 여행사에서 미리 계획한 여행지를 관광하고 알아서 맛있는 음식도 찾아 먹고 자유시간도 얻어 편하게 또는 바삐 움직인 여행이었다.

계획파 친구가 가끔 계획을 세우고 싶지 않거나 자신은 즉흥파인 듯 떠나도 되는 여행에 동참했더니 역시나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지만 볼거리도 있고 맛있는 버스 여행이었다.


이 여행을 다녀온 후 친구와 꽤 오랫동안 안 만났고, 코로나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코로나가 끝나면 친구에게 이번에는 진짜 자유 여행을 알려주고 싶다.

목적지만 결정되면 이후 발길 닿는 대로 아니면 그 상황에 필요한 것을 찾아 움직이다 마주하는 여행의 맛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

아니다, 친구에게 그 목적지도 비밀로 하고 나만 따라오면 된다는 여행을 해야겠다.

혹시 미리 계획해 놓은 곳으로 나도 모르게 따라다니는 여행이 될지 모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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