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라보라 Oct 22. 2021

나를 여행의 즉흥파로 만들어준 곳

무슨 음식이 맛있고, 어떤 장소를 봐야 하고 그곳이 왜 유명한지 말하며 우리는 특정 여행지를 떠올리게 된다.

여행 전에 나 역시 “전주”를 이야기할 적에는 비빔밥이 유명하고 한옥마을도 있는 곳이라 말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2014년 3월 남편이 6일 근무를 할 때 그는 어렵게 토요일 휴가를 얻어냈다.

욕심 같아선 금요일 퇴근길에 여행을 바로 시작하고 싶었지만, 금요일까지 야근 지옥을 탈출할 수 없었기에 우리는 금쪽같은 토요일 아침부터 여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친정 가족 여행이 여전히 많았다.

모처럼 둘만 떠나는 여행이자 우리의 결혼 기념을 위한 여행이기에 진작부터 들떠있었다.

심지어 당일 아침에는 풍선이 빵 터져버릴 것처럼 즐거운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     

부지런히 출발했기에 고속도로도 막힘없이 우리는 전주에 예상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와보니 다른 사람들도 다 전주에 여행을 왔는지, 아니면 무슨 행사 때문인지 한옥마을 근처에 주차할 곳이 없었다. 공영주차장으로 알아봤는데 한 곳은 폐쇄됐고, 다른 곳들은 만차로 입장 자체가 안됐다.

순간 나는 등에 땀이 삐질 날만큼 당황했다.

지금 빨리 주차를 해 놓고 가야 다음 코스가 진행이 되는데..     


결국 우리는 이곳저곳을 돌다 한옥마을에서 떨어진 대형마트에 주차할 수밖에 없었다.     


어렵게 주차를 하고 한옥마을로 향하던 길.

나의 부풀었던 마음은 완전 풀이 죽어버렸다.

내 여행 계획에는 주차라는 변수가 이렇게 많은 시간을 차지하게 될지 몰랐고, 주차라는 사소한 이유로 여행 일정이 꼬일 줄 몰랐다.


사실, 어렵게 온 여행이라 나름 여행 계획표를 짰다.     



계획표를 짰던 흔적들.


만약 계획한 대로 움직인다면 아주 핫한 곳들을 둘러보고 맛집 음식도 맛보고 짧은 1박 2일이지만 알차게 전주 여행을 했다고 자랑을 했을 텐데..

주차로 인해 여행 계획이 밀리기 시작했고, 주차하고 한옥 마을로 가는 길은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한옥 마을 근처 한지길 골목에서 갑자기 내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짜증이 확 올라왔다.

“아 억울해. 주차 때문에 이렇게 걷게 될 줄이야, 지금 이 시간에는 한옥 마을 구경하고 맛집에 대기를 걸어두었을 텐데 이번 여행 망친 것 같아.”     


내 말에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자기야 우리 이제 전주 땅 밟았어. 지금 이곳은 한옥 마을로 가는 길이고, 아직 시간 많아. 그리고 무슨 여행사도 아니면서 뭘 그리 여행 일정에 신경 써. 혹시 어디에서 커미션 받았어? 괜찮아. 지금 우리가 전주에 왔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야. 아니면 앞에 있던 계획은 했다 치고, 다음 계획한 곳을 가자.”     


속상한 마음을 내비쳤는데 남편은 오히려 괜찮다고 하며 차라리 미리 계획했던 맛집을 가자고 했다.

맛집이니 대기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식당에 도착했는데 일찍 왔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대기 번호가 50번을 넘긴 숫자였고 심지어 대기실이 없어서 식당을 둘러싸고 있는 인파 속에 맨 뒤에 꼬리로 서 있어야만 했다. 너무 많은 인파에 우리는 다른 맛집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곳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또 실망한 내게 남편은 다른 제안을 했다.

지나는 길에 본 식당인데 사람이 많지 않았다고 차라리 그곳에서 여유 있게 밥을 먹자고 했다.

조금 걷다 보니 도착한 그 식당에는 좌석이 몇 개 남아 있었고, 메뉴는 맛집과 비슷했다.

맛집을 못가 시큰둥한 내게 남편은 말했다.

“내 느낌에는 맛집보다 이런 근처에 있는 식당들도 맛있을 것 같아. 그리고 아까 지나칠 때 봤는데 여기 나오던 사람들이 서로 맛있었다고 이야기하더라.”     


잠시 후 주문한 음식은 남편의 예상한 대로 맛있었다.

만족스럽게 전주에서 첫 끼를 먹고 나와 기분 좋은 남편이 말했다.

“이것 봐. 여기 맛있었지! 맛집이라고 요란스럽기만 괜히 그곳에서 시간 허비 안 해도 되잖아. 이제 남은 여행은 이렇게 하자.”

“몰라. 이건 우연히 잘 얻어걸린 운 일지 몰라. 그런데 나도 지쳤어. 내가 짠 계획표는 이미 엉망이고 너덜너덜해졌어. 자기가 하자는 대로 할게. 앞장서봐.”     


이후 우리는 한옥 마을 근처를 유유자적 걷다 짧은 대기가 있는 카페에 줄을 섰다.

계획표대로 하지 않아도 되니 뭘 하든 해보자라는 식으로 생각을 바꾸니 마음도 가벼웠다.

또, 이곳에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다른 테이블에서 많이 먹는 메뉴를 눈치껏 보고 주문했을 뿐인데 정말 맛있었고, 전주에서 내려와 이래저래 떨어진 기운을 달보드레 확 끌어올려줬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전주 팥빙수 맛집


알고 보니 팥빙수로 유명한 카페인데 3월에 무슨 팥빙수야 하고 그냥 눈여겨보지 않았던 곳이었다. 우리는 대기가 짧은 타이밍에 잘 걸렸던 것이고, 이후 우리가 먹고 나오자 카페 앞은 대기자로 꽉 차 있었다.     


두 번의 경험으로 우리의 남은 전주 여행은 즉흥적으로 움직였다.

마치 많은 인파 속에서 주인공들은 유유자적 여유를 즐기는 것처럼 말이다.


밤에는 남편이 호텔 루프탑에 가보자고 해서 편한 차림으로 호텔 바에 올라갔다.     

마티니 한잔과 호가든 한 잔으로 우리의 여행을 자축하며 한가로이 전주 밤공기를 맡으며 낮에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에 있을지 모르지만 한적한 밤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그날 밤 여유로운 바에서 까만 하늘을 보면서 새삼 남편에게 고마웠다.

나의 징징거림에도 그의 의연함과 유연함으로 오히려 더 즐거운 여행이 되었으니 말이다.     


여행을 간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왕 여행을 왔으니 열심히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내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어렵게 마련한 놀이공원 티켓 한 장으로 하루에 그 넓은 놀이공원 놀이기구를 다 타려 했던 사람처럼.

재미있는 놀이기구를 타고 있더라도 다음 순서에는 뭘 타야 하지 이런 생각으로 정말 즐겨야 할 타이밍을 못 즐기고 놀이기구 탄 횟수에만 집중한 모습이랄까.     


장강명 작가의 <<5년 만에 신혼여행>>에 이런 글이 있었다.      


스스로 즐거워지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여행은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수도 없이 계획을 변경하다 겨우 즐기는 법을 깨달았을 때, 그때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 딱 이틀만 더 놀다 가면 좋겠는데’라고 아쉬워하면서.    

 

해답은 결국 어디서 뭘 하며 지내던지 <스스로 즐거워지는 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여행을 끝으로 나는 목적지와 숙소만 결정하고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그날의 날씨 그곳의 상황에 맞게 유연하게 다닐 수 있는 진정한 여행자가 된 것이다.


이제 내게 “전주”는 나를 여행의 즉흥파로 만들어준 곳이다.

누군가에게 전주를 말한다면, 즉흥 여행지라고 하고 싶다.

발길 닿는 곳이나 관심 가는 곳으로만 가도 근처에 먹거리 구경거리가 풍부한 곳이기에 그냥 그대로 즐겨도 되는 곳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전 08화 우리의 진정한 휴양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