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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Oct 18. 2021

두고 온 그것, 다녀온 그곳.

<떠난 자리>

나 떠난 자리

너 혼자 남아

오래 울고 있을 것만 같아

나 쉽게 떠나지 못한다, 여기     


이 시는 나태주 작가의 <<떠난 자리>>라는 시에서 인용했다.

이 구절을 읽고 내가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있었던 그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     


지루했던 평일을 마무리하는 금요일 밤, 남편에게 신나는 일이 없을까 이야기를 나누다가, 남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내일 새벽에 경포대로 일출 보러 갈래?"

그의 깜짝 제안이 날 기쁘게 했다.

"괜찮겠어? 난 좋아!"     


다음날 토요일 우리는 새벽 3시에, 남편이 좋아하는 경포대로 출발했다.

당일치기로 다녀올 여행이기에 각자의 외투와 모자만 챙겨서 출발했다.     


새벽에 경포대 가는 길은 무척 깜깜했고, 새벽 도로에서 하필이면 처참한 로드 킬 현장까지 보게 되니 생각보다 가는 길이 무서웠다. 남편은 아직 새벽 여명이 트기 전이라 배려하는 마음으로 잠들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이런 상황들로 짐작했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에 가는 길 내내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경포대로 향했다.     


드디어 일출시간에 맞춰 도착한 우리는 얼른 경포대 해수욕장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멋지게 떠오르는 일출을 생각했는데 날씨가 조금 흐려서 해수면 위로 천천히 올라오는 해는 보지 못했다.

이미 해는 떴지만 그래도 떠 있는 해라도 보고 가겠다고 기다리자, 내 마음을 알았는지 갑자기 구름이 잔뜩 가리고 있던 해를 보여줬다.

역시나 예상한 대로 해는 이미 해수면 위에 덩그러니 떠 있었다.     

"에잇! 아쉽다. 모처럼 해 뜨는 모습을 보려고 했더니 그 얼굴 참 비싸네~."     

경포대 일출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리는 경포대 근처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초당 순두부 가게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몽글몽글하고 뽀얀 순두부가 그렇게 나는 싫더라. 그런데 남편이 좋아한다니 .     

그리고 예전에 초당 순두부를 잘못 먹고 탈 난 적이 있어서, 그리 맛있는 식사라곤 느껴지지 않았지만, 평소 나 때문에 못 먹던 순두부를 먹을 기회를 잡은 남편은 나와 반대로 매우 맛있게 먹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제대로 일출도 못 보고, 내가 좋아하는 음식도 아니라서 식사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경포대로 출발 전 들떴던 설렘을 채우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이것저것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한 곳이 안목해변의 ‘커피 거리’였다.     


갑자기 기쁜 마음이 솟구쳤다.

급하게 찾은 정보지만 달달한 디저트를 먹으면 당이 확~ 오를 것 같은 환희가 미리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서둘러 찾아간 안목해변의 커피 거리에는 향기로운 커피 향을 내뿜는 카페들이 많았고, 선택지가 너무 많아 행복한 고민을 하다가 한 곳을 결정해서 조각 케이크와 함께 커피를 테이크 아웃했다. 이미 커피 향에 취하고, 주변 경치에 반한 나는 카페 안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었다.      


이른 시간이라 안목해변 그네 의자가 비어 있었다. 내 마음과 딱 어울릴 장소였다.     

그래서 한가로운 안목해변의 그네 의자에 앉아 커피 한 모금과 달달한 케이크를 한입 먹었을 때 너무 좋았다.

춥지 않은 바닷바람과 잔잔한 파도 소리 그리고 맛있는 커피와 케이크가 있었고, 남편이 아주 여유롭게 그네 의자를 흔들어줘서 정말 평화로웠다.

이 그네 자리였는데..


출발 전에 부풀었던 설렘을 멋진 풍경과 디저트가 부족했던 부분까지 꽉 채워준 기분이었다.      

평소 음료를 빨리 마시는 남편도 얼마나 여유로웠는지 나의 느린 템포에 맞춰 함께 마셔줬다.

기분 좋게 그네 의자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찍 일어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남편의 어깨에 기대어 잠깐 눈을 감았더니 그새 잠든 나를 깨우며 남편은 말했다.

"다른 곳 더 구경하고 오후에 갈까? 아니면 차 밀릴 거 생각해서 그냥 지금 갈까?"     

단잠에서 깬 나는 비몽사몽으로 이미 충분히 만족스러운 일출 여행이었기에 어딘가를 더 구경할 생각도 없었다.

"그냥. 지금 가자. 일찍 가서 쉬어도 좋을 것 같아."     


우리는 안목해변의 그네 의자에서 일어나 집으로 출발했다.

잠에서 깬 후 바로 출발했기에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차에 탑승했고, 출발했다.     


한참 출발해서 중간쯤 오면서 말했다.

"아까 정말 잘 잔 것 같아. 이제 잠이 다 깨네. 차도 안 밀리고 좋다."     

그리고 창밖을 보며 짧은 외출일 수 있는 반나절 여행의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난 갑자기 덜컥 식은땀이 흘렀고, 놀란 마음에 뒷좌석을 확인해봤다.

"우리 외투랑 모자 다 챙겨서 왔지?"

남편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렇지. 챙길 게 뭐 있어. 모자는 쓰고 있었고, 외투는 입고 있었잖아."     


뒷좌석을 확인하고 나는 허탈했다.

남편이 그네 의자 바닥이 차다고 깔아준 그의 외투를 안 챙겨 온 것이다.      

평소 어느 자리에 머물다 떠날 때 내 자리를 확인하는 습관이 있다. 그런데 이날은 얼마나 잠이 달콤했기에 아무 생각 없이 떠나온 것이다.      

남편도 믿기 힘들다는 듯 그냥 차만 탄 것에 놀란 얼굴이었다.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남편은 아주 쉽게 결단을 내려주었다.

"자기야, 괜찮아. 됐어. 잃어버렸어. 벌써 누가 주워갔거나 버렸을 거야. 누군가 알아보고 입는다면 그나마 다행인데, 혹시나 쓰레기통으로 버려졌다면 아깝다."     


남편은 옷이 많지 않다.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이 확실해서 옷들이 딱 정해져 있다.

그리고 몇 벌 안 되는 외투에는 다 사연이 있었다.

특히 이 바람막이용 외투는 자신이 군대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처음 산 외투였다고 했다. 그것도 한정판으로 나온 것.

패션을 잘 모르는 나도 조금 독특하고 품도 넉넉해서 남편에게 참 넉넉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던 그 옷.      

그런 사실을 알기에 난 할 말이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검색뿐.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옷을 다시 구입할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이 검색을 했는지 모른다.

그 사실을 안 후 어느 휴게소를 들리고, 얼마 만에 집에 도착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잃어버린 물건이 생긴 뒤 이후의 기억은 없다고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흘러도, 비슷한 옷을 발견하면 꼭 그에게 보여 주며 구입 여부를 물었지만 그의 대답은 단호하게 괜찮다고 안 사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편치 않다.      

그 브랜드는 왜 그 옷을 다시 안 만드는 거야!      


아직도 안목해변 하면 그 옷을 잊을 수 없다.

안목해변의 맛있었던 디저트도, 해변의 멋진 풍경도 생각나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건 내가 떠난 그네 의자에 덩그러니 남겨졌을 그의 외투다. 기분이 좋을 때 마주하는 그네 의자는 사람들의 다녀간 온기가 있는 따뜻함으로 다가왔지만, 무언가 잃고 바라보는 그네 의자는 쓸쓸함과 여운이 맴도는 말 그대로 ‘떠난 자리’로 느껴진다.           


여행지에 대한 기억보다 잃어버린 물건이 먼저 떠오르는 그곳.

가끔 그곳을 가면 난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네 의자를 다시 한번 쳐다본다.       

안목해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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