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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25. 2024

용기를 세는 밤

정음은 악성뇌종양 수모세포종이다. 머리에 뇌척수액이 가득 찼다는 신호는 급기야 보행장애와 구토로 나타났었다. 생각해 보면 약하게 아이는 신호를 보냈었지만 나는 그저 동네 여러 병원들을 돌아다녔고 그때마다 진료의 들의 '별 일 아니다'라는 진단을 받고 경미한 약 처방을 받았었다. 나를 포함하여 그 누구도 '뇌종양'이라는 건 의심하지 않았다. 정음이가 한 달 전 갑자기 비틀거리며 걷다가 넘어질 정도의 눈에 띄는 보행장애를 발견하기 전 까지는. 



생각해 보면 어른들의 세심한 관찰과 의심이 부족해서였을지 모른다. 정음이는 이미 너무 많이 아파있었는데. 철이 많이 든 아이라서 '괜찮아.'라는 말을 달고 산 나의 쌍둥이 둘째.... 아직도 매일밤 그 생각을 하면 피눈물이 난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종양이 악성으로 크게 번지고 뇌간에 붙어있기 전에만 알았더라면. 양성이었을 때 알았더라면. 아주 작았을 때 미리미리 알았더라면. MRI를 진작에 찍어 보았더라면...... 그러나 그 어떤 동네 병원에서도 MRI를 권유하지 않았었다................ 나는 솔직히 속으로 여전히 묘한 분노를 감출 수 없다. 그 분노는 아마 나 자신을 향한 것이리라. 정음을 이 지경까지 만든 장본인... 무지했던 엄마... 



그래도 잘 사줘서 고맙다...



5월 2일 개두술 이후 5월 말이 되어 항암을 위한 첫 후속치료를 들어가기까지.  많은... 그러니까 정말이지 너무나도 많은 심적 고민과 고통스러운 감정과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간의 흐름이 맡긴 채 그렇게 5월을 보냈고 어느새 6월도 흘러가는 중이다. 오늘 기준, 항암 2회 차의 마지막 날, 늦은 오후까지 이포스파마이드와 에토포사이드, 그리고 방광보호제 (Mesna)를 맡고 나면 드디어 퇴원. 물론 퇴원을 해도 2일 지나 다시 외래 진료를 와야 한다. 또한 ANC 수치가 급격히 낮아지는 시기라 37도가 조금만 넘거나 열패턴 불안정, 중심정맥관의 발열이나 통증 등, 정음에게 어떤 이상 현상이 생기면 며칠 전처럼 다시 응급실에 와서 입원해야 한다. 그뿐이랴. 7월 초엔 방사선 양성자 외래 진료도 잡혀 있다. 정음과 나에게 이제 병원은 집보다 더 오래 자주 머무는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 같다. 아주 잠시였으면 좋겠는데. 이 시절도 지나가긴 할 텐데.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여태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병원밥을 유독 잘 먹지 않는 정음을 위해 매끼 궁리를 한다. 아쉬운 데로 배달, 편의점 등을 이용해 봐도 아무래도 여의치 않아 이젠 병원 앞 길을 건너 조금 떨어진 곳 하나로마트로 자주 향한다. 물론 그럼에도 병원에서 '해 먹을' 수 있는 건 엄청난 한계가 있다. 전기 멀티쿠커까지 장만했지만 아직 초보간병인인 나로서는 그저 밀키트를 팔팔 끓이거나 데우거나 하는 아주 불량한 수준의 음식. 그럼에도 항암 하며 수치 그나마 떨어지지 않을 때, 식욕 있고 구내염이 심하지 않을 때 먹여야 한다. 그럼에도 그 어떤 음식도 손가락이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는, 아이의 좌절을 누르지 못한 채 숨 죽어 있지만. 




왼손가락... 재활 잘하면 되니까...  너무 많이 좌절하진 않기를..



저녁 8시 즈음, 남편과 잠시 교대를 하고 마트를 왕복하는 1시간.  하늘을 쳐다보았다. 해는 이미 지난 지 오래지만 하늘 바깥으로 보이는 선분홍색 구름.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다 다시 공기를 들이마신다. 눈물이 또 왈칵 쏟아져내리려던 찰나, 고개를 위로 힘껏 올려 겨우 흐르지 않게 막는다. 그러곤 나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정음이랑 어서 함께 걷고 싶다... 미안해. 나 혼자 나와서. 





매일 밤이 지날 때마다 나는 용기를 세는 것만 같다. 하루 또 하루.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을. 조금씩 좋아지고 있음을. 조금씩 그놈의 종양이 없어지거나 작아지고 있음을. 왼쪽 왼발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던 정음은 어느새 부쩍 힘이 들어가 있는 몸을 움직이려 애쓴다. 그러다 좌절스러워 또 짜증을 연신 내고 말지만. 그런 아이를 지켜보면서 마음이 무척 쓰리고 아프고 여전히 울컥하고 울렁거리며 자꾸 눈물은 나려 한다. 



그러나 분명한 건 우리는 용기를 내고 있다는 것을 나와 정음이는 느끼고 있다. 매일 밤이 지나갔을 때. 우리가 만든 용기들을 세 본다. 하룻밤, 이틀, 삼일, 그렇게 한 달, 그리고 앞으로 몇 달, 몇 년이 될지도 모를. 용기를 세는 밤이 많아진다는 건 우리가 나아가는 시간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것일 테다. 이젠 제법 서로 농담도 자주 주고받으며 이 순간들이 '별 일' 아닌 똑같은 일상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생각을 애써 해 보면서. 



오늘 정음이는 어떤 용기를 낼까. 오늘 나는 어떤 용기를 또 낼 수 있을까. 그것이 어떤 형태이든,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나는 믿는다. 아니 믿고 싶다... 우리의 용기에는 점점 더 힘이 세 지고 있음을. 다 이겨낼 수 있음을. 별 일 아님을. 그렇게 아침을 맞이하고 어느새 정오가 다가오고 있다... 



우리가 용기를 세는 밤이 많아질수록. 시간은 이렇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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