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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븐 Jun 19. 2024

먼 길로 돌아갈까

정음아... 우리는 먼 길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야...

지난주 토요일 정음은 퇴원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입원을 앞두고 있다. 내일, 2차 항암을 위해서. 원래 항암 계획대로라면 '낮병동'이라는 오전 8시 출근 오후 5시 퇴근의 형태를 띤 통원 항암을 해야 할 테지만. 정음의 최근 상태 및 현 거주지에서부터 병원까지의 왕복 거리 등을 감안했을 때 입원 치료를 고려해 주신 것. 어느 것이 아이를 위한 일인지 나는 여전히 늘 선택 앞에서 고민한다. 무엇을 선택하든 모두 내 잘못으로 인한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일 테다. 처음부터 앞으로도 내내. 어떤 선택을 하든 그것으로 인한 어긋남은 모두 네 못난 어미인 내 탓이었노라고...



입원 전, 그리고 이사 전. 병원에서는 멀지만 잠시 친정 집에 거주하면서 정음의 투병과 나의 간병은 지속된다. 다행히 간병을 혼자 하는 건 아니다. 어머니가 물심양면 도와주신다. 가사 살림 요리만 해도 어디인가. 그게 전부라 볼 수 있겠지만. 다만 모든 것은 대가가 있다. 간병의 고된 순간과 목도하게 되면 친정어머니의 불 같은 성격 상 거친 화와 성난 목소리는 견뎌야 한다.



힘들게 먹은 밥을 정음이가 결국 토했을 때. 매일 새벽, 오줌이 연신 새어 나가 이불과 매트 등이 연신 흠뻑 젖었을 때. 왼 손과 왼 발이 여전히 말을 잘 듣지 않아서 가끔 좌절감 때문인지 불같이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화를 내는 아이... 정음을 달래는 데 실패하는 순간에 나는 눈물을 참고 그 공간을 빠져나온다. 그럼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달래주신다. 겨우 화가 잠재워졌을 때. 나는 말없이 아이를 멀리서 지켜본다. 눈물이 금세 툭 하고 흘러나올 것 같을 때. 입술을 꽉 깨문다. 어금니를 세차게 문다. 눈을 감는다. 눈물을 겨우 말린다. 다시 눈을 뜬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내게 말을 건다.



먼 길로 돌아갈까.



분노에 차다가도 다시 잠잠해지는 널 볼 때마다...






친정엄마과 아들쌍둥이 엄마가 된 딸. 여자는 잦게 다투나 그럼에도 분투한다. 둘째 정음, 아이를 그저 제대로 지켜내기 위해서. 싸우지 않으려 노력한다. 싸울 일은 애초에 없다. 다만 두 여자가 견디지 못하는 건 간병을 하면서 재배열된 일상의 매 순간 속에서 어처구니없는 좌절에 이기지 못해 끝내 화를 내고 마는 것. 단지 그것뿐. 그렇다. 일상은 재배열되었다. 완벽히. 확실히. 거침없이. 시도 때도 없이. 그리고 나는 느낀다. 엄청나게 큰 무언가를 잃은 뒤에야 비로소 배우는 깨달음에 대해서. 깊고 절절하게. 뾰족한 대바늘로 연신 온몸이 찔러지는 듯한 고통... 아니 그 어떤 국어적 표현을 잃는다. 어떤 단어 어떤 문장으로도 '이 심정'을 표현할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아마 앞으로도. 평생 지속될까...




나는 내가 느끼는 참담함이 곧 정음이를 사랑하고 그를 필요로 한 내 마음의 크기에 맞먹는 것임을 이제야 실감하는 중이다. 아이의 싱싱했던 체력. 그야말로 '평범' 하게 성장해 준 아이의 예전의 모든 순간들. 그 순간은 이제 보이지 않는다. '잠시'라고 믿고 있다. 다만 잠시 정음이의 예전 모습은 뇌간 잔존 유착 종양들로 인해 빼앗겼을 뿐이라고. 항암을 하는 과정 속에서 어떤 슬픔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이렇게 '글'을 쓰게 만든다... 지금 이 순간조차. 아침에 열심히 먹은 밥을 갑자기 다 토해낸 정음을 거실에 눕히고 평소 좋아하던 유튜브를 틀어 주면서. 그 곁에서 키보드 위에 두 손을 얹으려는 나 자신이 정말 미친년 같지만...




어제는 밥을 먹다, 자연발치가 되었다.. 너무 의젓하게도 멸균거즈를 가져다 달라던 너였다..




먼 길로 돌아가고 있다.



좋아하는 에세이스트인 '캐럴라인 냅'은 40대의 나이에 암으로 인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녀와의 기억을 추억하는 글을 책으로 남긴 작가 게일 콜드웰. 그 책의 이름은 '먼 길로 돌아갈까'이다. 처음 출간되었을 때 나는 몰랐다. 그 책의 제목을 절절한 아픔으로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정음과 나. 그리고 친정어머니. 세 사람의 '오늘'은 여전히 앞을 향해 진행하는 중이다. 아이가 토하는 모습을 보고 아이를 안심시키고 눕히는 나. 그러면서 동시에 너무 많이 먹였다면서 혼자 구시렁 대는 나. 그런 나를 두고 괜히 속상함에 화를 내고 마는 친정어머니. 결국 눈물을 감추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면서 눈물을 씻는 나. 아무것도 모르는 듯, 아니 어쩌면 다 알면서도 의젓하게 모르는 척하면서 유튜브를 살펴보며 조용히 눈을 끔뻑이는 정음....



세 사람의 삶이 이렇게 흐르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작은 지옥'을 경험하는 중이다. 힘든 일은 계속될 것이고 앞으로 더하면 더했지 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각오 정도 되어 있다. 솔직한 나로서는 간병이든 투병이든 '미화' 시키고 싶지 않다. 다만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그리고 여전히 말로 표현되지 못하고 마는 '작은 지옥' 들을 이렇게 글로 나마 감정을 응고시켜서 바깥으로 흘려낼 뿐이다. 그래야 좀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그래야 절망과 좌절을 없애고 다시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으로 숟가락을 쥐려는 네가 참 감사하다..





이 작은 지옥을 건널 수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정음' 덕분이리라. 변하는 너로 인해 나는 견딜 수 있는 것일 테다. 정음이는 퇴원하자마자 재활 의지가 솟구치는지 아니면 잘 움직여지지 않는 왼발과 왼손이 걱정되서인지 자꾸 움직이고 있다. 기적처럼. 너무 감사하게도. 아이는 부들부들 떨리는 오른손으로 밥 숟가락을 붙잡았다. 그리고 스스로 밥을 떠먹으려 한다. 친정어머니와 나는 감탄한다. 그러면서 서로의 눈시울의 붉어짐을 애써 감추어낸다.



뇌암인 뇌종양. 그것도 악성 뇌종양. 이 비극과 마주하기 시작한 정음과 나. 그 덕에 자주 목도하게 되어 버린 일상의 작은 지옥들. 그러나 나와 정음은 지지 않고 싶다. 지옥을 애써 없애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그 지옥을 잘 건너가고 또 돌아가려는 분투를 할 뿐이겠다.



길로 돌아가는 중일 뿐이라고 믿고 살아내고 있다. 그저 다만 정음과 내가 마주한 지옥을 천천히 건널 있는 방법들을 터득해 나가면서. 변화와 성장이란 이처럼 지옥을 피하는 아니라 피할 없는 지옥을 '좋은 변화'를 통해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산다... 불행을 단지 불행으로만 보는 아니라 불행을 원력 삼아 그것으로부터 삶을 지켜나가는 힘. 만약 정음과 내가 앞으로 어떤 '성장'을 한다면 아마도 그건 문장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리라.



먼 길로 돌아갈까. 정음아..

우리는 먼 길로 돌아가고 있을 뿐이야.



먼 길로 얼마든지 돌아가도 된다. 함께 갈 수만 있다면 돼.




이 시간을 견딜 만한 것으로 느끼게 해 주는 건 아마 이런 생각 덕분이지 않을까...

누구도 정음과 나 대신 이 지옥을 건너주지 않는다는 걸 안다. 오직 아이와 나. 우리 둘이서 견디며 나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변해야 할 것이다. 좀 더 굳건하게. 변화라는 건 결국 당사자들만이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여전히 나는. 눈물이 가끔 난다... 너무 나려고 해서 정말 미쳐버리겠다. 돌아버리겠다. 눈물이 말라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실상 그게 아니었나 보다. 먼 길로 돌아가는 이 과정의 초입부에서. 요령 없고 모든 처음인 초보 간병인인 나는. 스스로 거동 못하는 아이가 되어 버린 정음 앞에선 울지 않지만.



아이의 사진을 볼 때마다. 언제나 그대로일 것 같았던 시절 얼굴이 떠올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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