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90세 디자이너의 인터뷰를 읽었다. 코스모폴리탄에 실린 34년생 진태옥 디자이너 이야기다. 한국 기성복 시대를 연 장본인인 그는, 소녀 시절에 흰 셔츠를 본 찰나의 순간이 자신을 디자인으로 이끌었다고 고백한다.
<평균 나이 82세, 일하는 할머니들의 지금>, 코스모폴리탄
인터뷰에는 74년 전 일이 마치 어제 겪은 일처럼 묘사되어 있다.그는 그찰나의 경험이 영혼을 흔들어놓았다고 했다.인간은 참 재밌는 존재란 생각이 들었다.피난 중인 극한의 상황에서도 꿈을찾아낸다. 그리고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한다.
나에게도 영원히 간직될 순간들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엄마보다 나이가 많은 담임 선생님이 계셨다. 그때 우리는 매일 일기를 써서 선생님께 검사를 받아야 했다. 선생님은 모든 아이들의 일기장에 2-3줄 정도 코멘트를 남겨주셨다. 선생님이 남겨주시는 '댓글'을 보기 위해 일기를 쓴 적도 있었다.
내가 어떤 일기를 적든, 선생님의 댓글은 항상 따뜻했다. 교회에 다녀왔다는 일기를 쓴 날엔, 함께 기도한다는 응원을 남겨주시기도 했다. 가족도 아닌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고 나의 미래를 응원해 준다는 것이 부끄럽고, 신기하고, 고마웠다. 매일 병원에 다니면서 골골댔던 나였지만, 선생님이 건강해질 거라고 말하면 정말 그대로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나서도 선생님이 남겨준 말들은 내 안에 뿌리를 내려, 나를 일으켜 세웠다. 어린 시절에 듣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아이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선생님은 아셨을까.
이름을 빨간색으로 쓰지 않으려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예전에 필리핀 출장을 갔을 때, 우리의 후원을 받고 졸업한 친구의 간증을 들었던 적이 있다. 어릴 적에 가난이 너무 싫어서 죽으려고 했단다. 어디서 쥐약을 구해왔는데, 먹고 죽기 전에 후원자가 보낸 편지가 생각났단다. 그래서 편지 보관통을 열어 후원자가 보낸 편지들을 찬찬히 읽어봤다고 한다. '나는 널 응원해. 넌 소중하고 중요한 사람이야. 넌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그는 낯선 언어로 가득한 편지를 읽고 한참을 운 뒤에 다시 살아보기로 결심했다. 자신이 죽으려고 했었던 것도, 그분의 편지 때문에 다시 살기로 했다는 것도 후원자는 모를 거라고 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다른 후원자들에게도 꼭 들려주고 싶었다. 고작 한 달에 몇 만 원 보내는 것, 편지 몇 줄 쓰는 것이 그 아이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까 의심이 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표현한 작은 '선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을 살려낼 수도 있다고. 당신은 좋은 일을 베풀고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고. 사랑은 사랑에게로, 사랑일 수 없는 곳까지 흘러가고야 만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