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강하다. 강해야 한다.
남편이 폴란드로 출국을 한 것은 9월 초였다.
아빠가 출국하는 날, 첫째는 정말 오랜만에 울면서 등원을 거부하다가 억지로 셔틀버스에 태워져서 유치원에 등원했다. 남편 출국 후 3개월 후 우리가 따라가기로 했기 때문에 100번 자고 아빠를 만날 수 있다고 했는데, 100이라는 숫자의 개념을 모르니 속상함을 그렇게 표현했나 보다. 담임 선생님에게도 아빠가 폴란드에 일하러 갔다고 전했다고 했다. 둘째는 아직 말도 거의 못 하는 시기라서 둘째 어린이집에는 아빠의 부재를 굳이 알리지 않았다.
남편의 출국 후 바로 며칠 후, 첫째의 4번째 생일이었다. 유독 남편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던 날. 유치원에서 성대한 생일 파티를 하고, 하원 후 할머니 할아버지와 생일 파티까지 하고, 아빠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게 하느라 나름 마음을 많이 쓴 첫째의 생일이었다.
보통 그렇듯이 남편이 먼저 주재원을 나가게 되면 남은 과제는 한국에 남은 사람의 몫이다. 굳이 번호를 매겨보자면 아래와 같다.
1. 평일에도 주말에도 오롯이 혼자 견뎌야 하는 아이 둘 육아
2. 컨테이너 이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버려야 할 짐은 버리고, 가져가야 할 짐은 가져가고, 새로 사야 할 것들은 새로 사야 하는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짐 꾸리기
3. 부동산 계약 및 집수리보수와 청소, 청소, 청소
4. 폴란드에 살 집과 아이들 유치원 알아보기
평일 아이들이 등원하는 10시부터 3시 반 사이에 2번과 3번의 일들을 다 처리해야 했다. 그 와중에 집안일도 해야 하고 애들 밥준비도 해야 하고,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다 보니 아플 시간도 없었다.
혼자 아이 둘을 육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주말에 둘째 낮잠을 재우는 것이었다. 첫째는 이미 낮잠을 안 잔 지 오래이고, 둘째는 낮잠을 안 자면 피곤해서 찡찡대며 힘들어하는데, 오빠가 눈앞에 안 보이면 계속 오빠를 찾는 통에 셋이 같이 누워있으면 둘이 또 놀게 되고, 그럼 또 낮잠을 못 자고.
컨테이너 이사 날짜가 정해지기 전부터 이사준비 겸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폴란드에서 집을 구하기 전이었지만 대부분 가구가 다 갖추어져 있는 집이라고 해서, 큰 가구를 뺀 짐들만 정리하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도착해서 바로 사용해야 할 물건들과 컨테이너로 보낼 물건들을 분류하는 것이 사실 제일 까다로웠다. 우리가 폴란드에 도착하는 계절은 겨울인데, 보통 컨테이너 이사는 3개월 정도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컨테이너가 1월 말에서 2월 초에 도착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래서 겨울에 필요한 것들을 비행기로 옮겨야 했기에, 겨울 준비를 하는 짐들이 많았다. 아이들 옷도 물론 폴란드에서 구입할 수 있지만 품질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고 하여 한국에서 모자, 목도리, 장갑, 부츠, 겨울 잠바까지 다 준비해서 비행기로 갈 짐에 챙겼다. 나머지 한국 집에서 가지고 가지 않을 짐들을 구분하고, 혼자 버릴 수 있는 것은 분리수거 및 폐가전으로 버리는 것도 사실 꽤 품이 많이 들었다. 우리 아파트는 월요일에만 분리수거가 가능했기 때문에 엄마가 같이 정리하시다가 집으로 가져가서 분리수거해서 버리신 것도 꽤 많은 양이 되었다. 이렇게 또 딸은 엄마찬스를 썼다.
컨테이너 이사 할 때 사가면 좋을 것들을 매일매일 검색하고 폴란드에 있는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며 꽤 많은 것들을 구입했는데, 결국 컨테이너 문을 닫을 때 보니 컨테이너의 반 밖에 차지 않았다. 사실 아직도 그때 사용한 카드 할부를 갚고 있다. 컨테이너를 다 채웠다면 도대체 얼마나 비용이 나왔을까. 주로 가공식품, 아이들 의류, 공산품을 구입했다. 현재 아직 컨테이너는 도착하지 않았고, 나름 꼼꼼히 준비한다고 생각하며 비행기에 짐을 넣어 왔는데, 소소한 공산품들이 아쉽기는 하다. 한국에서는 다이소에서 값싼 가격에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들인데, 여기서는 마트에서 제법 큰돈을 줘야 한다. 예를 들어 투명 박스테이프도 여기에서는 한국돈으로 개당 7000원 이상이다. 모든 것을 다 싸 올 수는 없지만 왜 한국에서 먼지라도 가져오고 싶다는 말이 있는지 알 것 같다. 아이들 장난감, 색종이, 테이프, 책 등은 많이 가져온다고 싸왔는데도 부족한 듯싶다. 컨테이너가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우리의 출국 일자가 정확히 정해지지 않았지만 대강 10월 말쯤에는 출국한다고 생각하고 세입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우리는 폴란드에서 가구와 가전이 거의 갖추어진 집으로 들어갈 것을 예상했기에 한국집에 있는 가전을 정리하기보다는 가전도 같이 사용할 세입자를 구하는 것이 목표였다. 나름의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친절한 부동산 사장님을 통해 원만히 세입자를 구하고, 우리가 폴란드에 도착 한 이후에 세입자가 이사 와서 현재까지 별 탈 없이 지내고 있다.
세입자를 구하고 폴란드로 떠나기 전,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커다란 트램펄린도 혼자 해체해야 했고, 화장실의 변기 비데뚜껑도 스스로 교체해야 했다. 남편이 있었다면 당연히 남편이 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일들을 스스로 해내면서 엄마는 강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남편의 부재가 컸지만 어쩔 수 없이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모든 일들을 어찌어찌 다 해결했다.
폴란드에 살 집을 알아보는 것은 남편 회사에서 소개해준 부동산 중개인의 도움을 받아 인터넷에 올라온 몇 개의 집 가운데 남편이 방문해 보고 결정했다. 주택이냐 아파트냐 많은 고민을 했지만, 우선 우리는 이주 첫해이기에 아파트로 방향을 정했다. 우리가 도착하는 시기가 겨울이기에 주택이 추울 것이 걱정되었고, 아이 학교까지 트램을 이용할 계획이라서 교통편의도 고려했다. 주택은 보통 시내가 아니라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서 자가용이 없이는 생활이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운전 경력이 10년 정도 되었고 태국에서 살 때는 오토바이를 운전하고 다니기도 했지만 말이 안 통하는 외국에서 아이 둘을 차에 태우고 운전하고 다니기에는 아직 두려움이 크다. 태국에서 택시를 타다가 사고가 난 적이 있는데, 태국인 친구가 도와주었는데도 덤터기를 쓰게 되더라. 물론 영사과에 연락했지만 도움은 안 되었다.
아이의 학교는 폴란드행이 정해지자마자 알아보기 시작했다. 영어 유치원을 몇 개 연락해 보고 화상회의도 해보고 이메일 교환도 해 보았는데, 캐나다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학교로 마음이 기울었다. 현지에서 한국인들이 많이 보내는 국제학교가 따로 있었기에 두 군데 중에서 많은 고민을 했는데, 지금까지 여러 기관에서 근무해 본 결과 본사에서 시스템을 제공하고 모니터링하며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기에 캐나다 본사에서 관리를 해주는 학교로 결정을 했다. 최종 결정은 폴란드에 도착해서 아이가 학교를 방문해 보고 난 후에 마음에 들어 하면 학교에 입학지원을 하기로 했다.
그리고 폴란드에 갈지 말지 고민하자마자 내가 시작한 것이 있다. 바로 첫째의 영어공부이다. 공부라고 하기보다는 영어 놀이에 가까울 것 같다. 5살짜리 아이가 말 안 통하는 국제 유치원에 갑자기 등 떠밀려 갔을 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지 생각해 보니 영어가 가장 우선이었다. 두세 달 동안 평일 일주일에 한 번씩 영어놀이를 하는 놀이학원 같은 곳에 태우고 다녔다. 그리고 남편이 폴란드로 먼저 떠난 후에는 집 근처 문화센터에서 영어 체육 수업을 듣게 했다. 주말마다 어디 가서 뭘 해야 하나 고민하는 것을 줄이기 위함도 있었고, 남자아이다 보니 활동하고 싶어 하는 에너지가 워낙 커서 영어로 하는 체육을 시키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았다. 크게 배운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어로 선생님이 말하고 기본적인 지시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는 도움이 된 것 같다.
오늘은 폴란드에 도착한 지 두 달이 되는 날이다.
폴란드에 도착한 후에도 엄마로서 강해져야만 하는 순간들이 자주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했던 두 달간의 시간이 나를 얼마나 강하게 했는지, 그 시간에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