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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석 Jul 24. 2017

그녀의 질서, 여수

여수에서 만난 농인

 세상의 질서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 옆에 있다. 그녀는 어릴 적 열병을 얻어 소리로부터 멀어진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그녀에겐 자기만의 순서가 있다. 자연의 법칙처럼 배웠던 알파벳 순서조차 그녀는 외우지 않았다. 사람들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살지 않는다는 것은 내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글은 그런 사람을 따라 나선 여행의 기록이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자신의 고향 이야기를 했다. 그곳이 그에겐 세상의 중심이라며. 어떤 곳보다 아름답다 말하곤 했다. 지금 기차는 종착역으로 치닫고 있다. 아, 여수! 햇빛에 달궈진 바다 냄새가 몰려온다. 파도의 동선을 그대로 실은 반도의 들쭉날쭉한 해안선들, 그리고 그 끝에는 윤기가 칠해진 이파리들이 맺혀있다. 검게 익은 건강한 피부와 맑은 눈에 그녀의 삶이 겹쳐졌다. 그녀는 정말 이곳을 닮았다.     


 여수 사람들은 바다와 작은 산을 사랑한단다. 필연적인 결과다. 야트막한 고도에서 보이는 나무들과 바다의 조합은 좋아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니까. 바다를 향해 난 창문 중, 숲만큼 좋은 창은 없다. 잎사귀가 쌓은 그림자 사이로 바다를 엿보는 것이다. 나무 사이를 뚫는 초록 광선과 바다 위의 푸른 반사광을 덧대보기도 하고. 그녀는 내게도 바다가 보이는 작은 언덕을 선물하고 싶단다. 차 안에서 수화도 몇 단어 가르쳐 줬다. ‘여수’, ‘산’, ‘바다’와 같은 단어들이다. 그리고 ‘산’이라는 단어와 ‘파도’를 뜻하는 수화를 나란히 보여주었다. 산과 바다를 모두 갖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이 수화는 ‘섬’이라는 뜻이다.      



 거리로도, 마음에서도 가장 가까운 섬이 오동도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중 오동도에서 찍은 사진 한 장 없는 사람이 없다. 오동도의 동백꽃은 12월부터 피고 4월에는 이미 바닥을 붉게 적신다. 우리는 떨어진 꽃을 하나씩 주워 들고 언덕을 올랐다. 빼곡히 늘어선 조릿대가 푸른 소리를 내며 다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골’이란 골짜기를 지날 때엔 정신없이 바람이 쏟아졌다. 나무 그늘로 뒤덮인 섬에 바다냄새가 드나들었다. 바다에서 달궈진 기류가 나무 사이를 비비며 다른 온도의 신선함을 품었다.     



 언덕의 정상쯤에 동백꽃으로 만든 차를 파는 곳이 있다. 잠시 앉아 서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그녀가 느끼는 숲과 바다가 궁금했다.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소통한다는 것은 또 하나의 여행이다. 그녀의 눈과 코는 고요한 세상을 채우며 그 이상의 감각기관이 되었다.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을 그에게 엿들으며, 나의 세상이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농인 중에서도 빗소리나 파도소리를 좋아하는 이들이 있다. 그녀 역시 숲이 스치는 소리와 바닷가에서 나는 소리를 좋아한다고 한다. 정확히 들리지 않아도.       


 숲이 내는 소리와 바다의 소리는 어떻게 달라?      


 그녀가 물었다. 생각해보니 크게 다르지 않다. 풀이 드러눕고, 나무가 바람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마치 물결 같지 않은가.     

비슷한 느낌이야. 솨아솨아!     


 수많은 생명들이 부딪치며 일렁이는 소리는 생각할수록 닮은 것이었다.      


 세상이 침묵하는 만큼 그녀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나 역시 감각의 막을 하나씩 닫으며 다른 감각을 열어두었다. 봄이 멀어지는 속도마저 보이는 듯하다. 작은 섬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꽃잎 하나마다 멈추어 담다 보니 날이 저문다. 숲이 내쉬는 한숨에 새들이 날아가고 있었다. 여수의 바닷물이 밤의 한복판으로 흐른다. 수면 위의 조명이 켜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검은색도 반짝일 수 있는 밤바다였다. 고요한 대화가 마음속에서 큰 동력을 갖는 밤이었다.      



 다음날 해가 뜨기 전, 전부터 꼭 가보고 싶던 곳이 있었다. 하늘에 퍼지는 오묘한 색이 곧 사라질까 걸음을 서둘렀다. 여수의 시내버스는 내가 여행을 다닌 모든 지역을 통틀어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도로는 위아래로 굴곡이 졌다. 양 옆으로 꿈틀대기도 했다. 급하게 요동치는 버스에 조금 놀랐다. 그녀가 메모로 말을 걸어왔다.      


여수는 원래 이래. 사람들이 위아래에서 들어오고 나가고,
좌우로 흩어진 뒤 다시 만나. 그래서 항상 그리운 곳.      


 바다와 마주선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항상 움직인다.      



 향일암으로 향하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산속에 숨겨진 어느 마을을 찾아가듯 바위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바다 앞의 이 높은 땅은 소리로 가득하다. 낙엽을 밟는 누군가의 걸음과 이름 모를 새의 울음, 저 멀리 밀려오는 포말은 예측할 수 없는 음원이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이 길에서 고요함을 만끽한다. 이 공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격하게 움직이고 큰 소리를 내지만, 당신의 삶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바다, 그리고 숲은 내 깊은 곳으로 대화를 걸어왔다. 다만 그 이야기는 둘만의 소통으로 남는다.       



 암자에 도착했다. 스님이 종을 치기 위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셨다. 그녀도 종소리를 보았다. 잠시 앉아 정성스러운 타종을 지켜봤다. 사람들이 몰려들어 구경을 해도 종을 치는 이는 매순간 한 동작에만 몰두한다. 여수는 이런 사람들의 터전이란 생각이 들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나무들이 자란다. 섬은 여기저기 솟았다. 산과 바다는 매일 부딪치고 있다. 매일 변하는 공간이다.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너무나 많은 곳이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순간을 소중히 하는 습관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여러 가지를 쫓다간 아무것도 사랑할 수 없다.      


 그녀 역시 한 번에 한 사람의 이야기에만 집중한다. 상대방의 손동작 하나에 많은 의미가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장면 속에도 깊이 있는 응시를 던지는 사람.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일대일의 소통을 경험하고 있다. 이것이 그녀가 세상을 대하는 질서다. 



 멀티태스킹이 하나의 윤리로 자리 잡은 시대에, 여기 천천히 거슬러 흐르는 마을과 사람들이 있다. 이번 여행에서도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많은 일이 있었다. 이동이 잦아질수록, 바람이 많이 불수록, 파도가 자주 올수록, 꽃이 많이 필수록 오히려 선명해지는 감각은 하나다. 떠오르는 사람도 하나다.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때 하나에 집중하는 그녀의 질서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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