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석 Sep 30. 2020

포르투, For two

포르투에서의 짧은 인연

 이따금 열어보는 추억 상자에는 잊어버렸던 이름들이 있다. 그날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며 작은 글씨로 메모를 해둔 기차표와 사진 – 그리고 그 사이에 색 바랜 엽서가 하나 있다. 그 밤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이 이름도 나의 답장을 보고 있을까.            



 그날은 친구와 떨어져 홀로 여행을 떠난 첫날이었다. 모든 일정을 둘이서 함께 짜온 터라 한 달 동안 같은 곳에 잠들고, 같은 것을 보았다. 둘이 나뉘어 각자의 여정을 시작한 계기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포르투로 떠나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그는 갑자기 택시를 멈추고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카메라를 두고 왔다며 허둥지둥대는 친구보다 당황한 것은 사실 나였다. 어쩌면 오늘은 혼자 여행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예약을 미루고 숙소로 돌아간다는 그에게 나도 하루 더 남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친구가 나를 말리며 말했다. 오늘은 나만의 여행을 즐기라고.



분홍 선을 따라


 비행기에서 내린 후에도 홀로 이동하는 모든 순간이 낯설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혹은 누군가를 떠올리기 위해 홀로 떠난 적은 있었다. 하지만 혼자 떠나는 여행의 의미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떠올려보면 나의 일과 나의 글, 심지어 내가 읽는 책까지도 늘 그 너머의 사람을 향해 있었다. 오늘은 나의 여행을 즐기라는 친구의 과제 앞에 나는 적잖은 당혹감을 느꼈다.     



 친구가 예약해 둔 숙소로 들어섰다. 커다란 플라타너스 나무 사이에 입구가 있는, 아파트 구조의 숙소였다.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직원이 번쩍 일어나 인사를 건넸다. 갈색 눈동자와 밝은 웃음이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예약 내역을 확인하더니 일행은 어디에 갔냐고 묻는다. 혼자 오게 된 사정을 말했더니 다시 한 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운이 정말 좋으신 거예요. 어제도 폭우가 왔었는데 이번 주 내내 날씨가 맑을 거래요. 거기다 혼자 여행할 기회도 얻었잖아요.”

“운이 좋은 걸까요? 예약도 친구가 다 맡아서 당장 어디로 가야할지도 잘 모르겠어요.”

“이 동네엔 혼자 산책하기 좋은 곳이 많아요. 지도 줘보세요!”     


 그녀는 분홍색 펜의 뚜껑을 입에 물고 능숙하게 형광펜을 뽑았다. 숙소에 먼저 별표를 그린 후, 길을 건너는 곳부터 추천하는 명소까지 표시한 뒤 분홍색 선으로 이었다. 가이드북은 싫어해도 여행 중 만난 이들의 추천은 따라가는 내겐 반가운 선이었다. 분홍 선을 손으로 짚으며 길을 확인하는 동안, 그녀는 방의 열쇠와 함께 예약내역이 적힌 서류를 건넸다.     


“생일이 다음 주네요. 저는 모레가 생일인데! 생일도 이곳에서 보내시나요?”

“아뇨, 이번 주에 떠날 것 같아요. 포르투가 마지막 여행지예요. 미리 생일 축하드릴게요!”

“고마워요! 저도 미리 축하해요. 내일 아침 잠깐 들르는 게 제 마지막 근무라 오늘이 마지막 인사일 수도 있겠어요. 한 바퀴 돌고 오실 때쯤이 제 마지막 퇴근이 될 거예요.”     



 미리 주는 선물이라며 그녀가 타르트 두 개를 건넸다. 숙소에 짐을 풀고 한 손엔 그녀가 준 타르트, 다른 한 손엔 사진기를 든 채 길을 나섰다. 지도에 표시된 동선은 효율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숙소에서의 거리와 상관없이 여기저기에 얽혀 있었다. 아마도 그 순서에 의미가 있는 듯했다. 그녀의 추천대로 종탑에 가장 먼저 올랐다. 도우루 강에서 시작된 바람이 내가 서있는 난간까지 불어온다. 그 바람을 타고 갈매기가 날아다닌다. 핀오크나무가 빨갛게 단풍이 드는 계절, 포르투 시내를 덮은 지붕도 주홍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숙소로 돌아갔을 때 그녀가 아직 자리에 있다면 보여주고 싶은 풍경이었다. 종탑을 한 바퀴 돌며 사진에 남겨본다.      

 


 지도를 따라 이동한 다음 장소는 종탑 옆의 한적한 공원이었다. 두세 사람이 껴안아도 팔이 닿지 않을 어마어마한 기둥의 플라타너스가 줄지어 서 있었다. 나무 사이사이에는 벤치가 있고, 낙엽에 발을 얹은 채 시집을 읽는 노부부가 앉아 있었다. 혼자 앉아 있으면 주변의 사람들이 더 잘 보인다. 특히 짝지어 가는 이들의 사연이 궁금해진다.      



잔디밭에 서로의 몸을 벤 채 누워있는 부부.

계단에 나란히 걸터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을 듣는 친구들.

난간에 기대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는 연인.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있는 엄마와 아들.     


 포르투는 혼자 산책하기 좋은 도시라더니. 다시 만나면 내가 목격한 거리의 인연을 하나하나 말하며 그녀의 말이 틀렸다고 농담을 건네고 싶었다.     



우연한 동행     


 지도를 따라 강가에 이른 후 다시 천천히 숙소로 향했다. 친구가 돌아오면 선물할 엽서도 몇 장 사고, 타르트도 몇 개 포장해 들어왔다. 입구에 그녀는 없었고, 다른 아주머니 분이 앉아 계셨다. 이대로 다시 보지 못하는 건가. 언제쯤 나갔는지 아주머니께 여쭤볼까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이내 발길을 돌렸다. 이 정도의 인연은 사실 한 달 동안 자주 스쳐 갔지 않은가. 방으로 들어와 타르트를 베어 무는데 왠지 그녀가 준 것보다 맛이 덜했다. 허해지는 마음을 달래려면 요기라도 해야겠다 싶었다. 혼자서는 레스토랑에 가기도 멋쩍었고, 오랜만에 한국 음식이 당겨 숙소 근처의 아시아 식료품점을 찾았다.      



 라면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여러 봉지를 집어 들던 찰나,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가 들렸다. 전화 너머로 언뜻 생일이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그녀였다. 말을 걸어볼까 고민하던 중 그녀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지도에 내가 식당도 표시해줬는데. 이걸로 떼울 생각이에요?”

“혼자 가기도 애매하고, 타르트를 먹었더니 배불러서요.”

“그럼 같이 공원에서 간단히 먹을래요?”

     

 그녀가 흔드는 장바구니에는 와인 한 병과 복숭아 요플레, 치즈와 빵 몇 조각이 들어있었다. 나 역시 종일 이야기에 목말랐던 참이었기에 선뜻 제안을 수락했다. 그녀는 나를 강 위의 다리로 데려갔다. 사람도, 트램도 오가는 독특한 다리였다. 사람들은 자유로이 걷다가도 트램이 지나갈 때 쯤 좌우로 흩어진다. 우리도 나란히 걷다 트램이 지나가면 나뉘어 걸어 본다. 내가 서 있는 쪽으로는 배가 지나고, 그녀가 서 있는 쪽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리의 반대편 끝에 다다르자 그녀가 내게 오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언덕 위의 모루 공원이었다. 반짝이는 강물만큼 강가에 앉은 사람들에게서도 빛이 났다. 잔디 위에 털썩 주저앉아 우리는 꾸러미를 풀었다. 플라스틱 컵을 맞부딪치고 빵을 나누어 먹는다.     


“혼자 다녀보니 어때요?”

그녀가 내 사진기를 뺏어들고 사진을 하나씩 넘기며 질문을 던졌다.   

“한 달 가까이 여행하면서, 오늘만큼 사진을 많이 찍은 날이 없어요.”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한 거죠. 발맞출 필요도 없이, 찍고 싶은 사진도 맘껏 찍고.”

“포르투에는 혼자 있는 사람이 별로 없던걸요. 생각보다 혼자 있기 힘들었어요.”     



 그녀가 대뜸 손가락을 들었다. 홀로 나무에 기대앉은 한 남자를 가리켰다. 그는 오늘의 마지막 햇볕을 조명삼아 독서를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혼자서 기타를 치는 청년이 보였다. 노을과 다리를 담으려 삼각대 앞을 지키는 노인도 보였다. 마지막으로 난간 사이를 뛰어다니며 묘기를 부리는 한 여성을 가리키더니 그녀가 웃는다.     


“저기 난간 사이로 뛰어다니는 사람 보여요? 걔는 학교 친구예요.”

다시 한 번 술잔을 부딪치며 우리는 크게 웃었다. 그녀가 말을 이어간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는 사람들이죠. 당신도 그래 보여요.”     

 그녀가 카메라 화면 속 사진을 짚으며 말했다. 낮에 이 근처까지 걸어왔을 때 찍은 강가의 사진이었다. 처음 듣는 칭찬에 부끄러운 마음이 올라왔다. 취기와 함께 얼굴이 붉어졌다. 강 건너로 보이는 마을은 주황색 지붕으로 덮여 있고, 하늘은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밤공기가 서늘해지자 그녀가 녹색 카디건을 허리춤에서 풀어 나와 그녀의 다리를 덮었다. 꾸러미에 남은 마지막 간식인 노란 타르트를 건네며 그녀가 싱긋 웃는다. 하루 만에 그녀는 포르투의 모든 색을 내게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녀가 마지막으로 내게 보여준 색은 아줄레주의 파란색이었다.     


 언덕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상 벤투 역이 있었다. 그녀는 내 소매 끝을 잡고 기차역 안으로 이끌었다. 기차역의 벽면은 아줄레주로 온통 장식돼있었다. 포르투갈의 도자기 타일인 아줄레주는 주석 유약을 발라 푸른빛으로 빛난다고 한다. 이만 개의 타일이 푸른색으로 빛나기 위해서는 벽에 붙기 전 구워져야 한다. 누군가는 이 타일들을 미리 배치했고, 그림을 그렸고, 일정한 색을 유지하도록 하나하나 구워냈을 것이다. 그렇게 타일 하나하나의 이야기들이 모여 포르투의 역사를 벽면 가득 펼쳐낸다. 파란색 타일 앞에서 상기된 얼굴의 그녀가 열정적으로 설명해준 이 내용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숙소가 가까워지면서 우리의 우연하고도 짧은 동행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 늦지 않은 시각이었는데 거리는 캄캄했다. 그리고 그 길에는 대마를 파는 청년들이 유독 많았다. 동그랗게 뭉쳐놓은 대마를 내밀며, 우리의 거절을 쉽게 받아들이고 돌아서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계속해서 흥정을 벌이고, 우리의 앞길을 막아서자 무어라 할 새도 없이 당황스러운 감정이 앞섰다. 그러자 그녀는 화를 내더니 내 팔목을 잡고 나를 끌어당겼다. 이내 그녀는 그 길이 끝날 때까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남은 이야기가 많았던 우리는 숙소 바로 앞의 펍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한둘씩 떠나고, 우리만 남을 때까지 우리는 다가올 여행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다른 여행지에서 또 만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녀처럼 좋은 친구를 만나려면, 오늘처럼 혼자만의 여행을 즐기고 있어야 한다고. 나는 반문했다. 결국 오늘도 혼자가 아닌 둘의 여행이 아니었느냐고. 혼자였기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 혹은 동행을 찾던 나의 길이 그녀에게 닿은 것일까. 펍의 문이 닫힐 때까지, 새벽의 푸르스름한 공기가 떠오를 때까지- 우리는 맥주잔을 가리개 삼아 서로에게 엽서를 썼다.      

 빼곡히 그날의 추억을 적었던 내 엽서완 달리, 그녀의 엽서에는 큰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언덕 위에 앉은 우리 둘의 모습이었다. 그 그림 아래에 그녀는 작은 글을 남겼다.      


우리 다시 술잔을 부딪치고, 여행자와 여행자가 되어 한 길에서 만나는 날까지 - 각자의 의미와 각자의 세계로.                        
이전 03화 유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