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
아버지라는 감옥은 쉬이 벗어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관계를 끊으려고 연락을 무시하며 몇 차례 탈옥을 시도했지만, 엄마를 찾아와 난동을 부렸다. 난동을 부리는 건 아버지인데, 이상하게 죄인은 나였다.
‘못난 딸년, 기껏 힘들게 키워 놨더니 은혜도 안 갚아? 나를 무시해? 너 때문에 네 주변 사람들이 어떻게 고통받는지 잘 봐...’
나도 괴로웠지만,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는 것도 괴로웠다. 결국 의무적으로 연락을 하며 안부를 묻고, 생신과 어버이날을 챙기며 죄수 딸로서 과업을 수행했다. 놀라운 건 더 이상 아버지의 협박이 없어도 '그럴지도 몰라.'라는 두려움이 그것들을 계속하게 만들었다.
몇몇 지인들은 이런 나를 보고 답답함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것은 아버지를 제대로 겪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곰 같은 덩치에 둔하고 순해 보이지만 아버지는 그것과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예민하고 또 예리해 심리전에 굉장히 능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가 괴로워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미 사실을 다 알고 있으면서 모른 척 물어보고 나로 하여금 거짓말을 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지?'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덜미를 잡아 빠져나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그 수법을 알면서도 아버지 앞에서는 심하게 위축돼서 매번 그 덫에 걸렸다. 아버지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나를 훨씬 더 잘 알고 있었고, 내가 아버지의 딸이라는 것이 변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아버지라는 감옥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나는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 죄인이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아버지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것은 죄인인 나에게 있어서 꽤나 대담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할 말을 이미 알고 있기에 더 받고 싶지 않았다.
“야 이 새끼야!!!”
분명 이 고함으로 시작할 거다. 그리고 자식 놈이 돼서 전화 한 통 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없던 죄목도 만들어 낼 것이다. 단 몇 분만에 나는 또 유죄 판결을 받을 거고 ‘아버지를 만나야 하는’ 죗값을 치러야 할 것이다. 이번엔 명절이라는 특수한 상황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한숨이 절로 났다. 마음 같아선 나도 끈질기게 울리는 전화를 받아 소리 지르고 싶었다.
“아버지는 제 역할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어째서 저에게는 딸의 역할을 충실히 하라고 하시는 건가요? 젠장!!!”
아버지는 나에게 '업무태만' 같은 죄목을 붙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나의 죄목은 다르다. 나의 죄목은 '딸'. 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다른 죄도 성립된다. 나는 딸이 아니라 '나'로 살기 위해 태어났는데 마음대로 역할과 업무가 부여되고 동기조차 주지 않은 채 일만 하라고 하는지... 분명 부당한데 나는 죄인이고 여기는 감옥이라서 그게 부당하지 않다.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어수선한 와중에 강정마을 이곳저곳에 거칠게 써놓은 글자들을 보니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그 울부짖음이 나의 마음과 비슷해서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의 억울함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머리로 마음으로 같이 느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했다. 나의 개인적 아픔과 비슷하다 말하기엔 조심스럽지만 가정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국가의 평화를 지키기 위함이었다며 방향을 잃고 안으로 향한 주먹에 상처 입은 처지는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그 상처가 얼마나 아픈지 나는 잘 공감할 수 있었다.
그들은 주먹을 휘둘러 원하는 결과를 얻었을까? 이것을 묻고 싶지만 아마 자신들은 주먹을 휘둘렀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혹은 그 주먹이 정당하다고 생각할 테니 질문을 그냥 거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냥 돌아서서 나와 비슷한 아픔에 고개를 끄덕이고 위로를 흘려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강정마을을 지나 서귀포시에 도착했다. 서귀포시는 그동안 걸어왔던 곳과 확실히 달랐다. 새로 지은 건물도 많았고, 도로도 깨끗해 보이는 것이 얼마 전에 새로 포장한 것 같았다. 신도시 느낌이 나는 서귀포시는 확실히 읍내가 아니라 도시였다.
제주도 절반을 걷고 나니 이제 페이스 조절도 할 줄 알게 되고, 요령도 생겨 조금 여유로운 마음으로 도시를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숙소로 향했다. 도망치다시피 제주도에 와서 매일 어둠과 트라우마에 쫓겼는데 오래간만에 여유를 느껴다. 그 여유를 한창 만끽하고 있는데 전화가 그 산통을 깼다.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어 야속한 눈으로 핸드폰을 들춰 봤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아버지 전화를 무시하고 난 후라 혹시 아버지가 다른 전화로 전화를 건 걸까 봐 주저하고 받지 않았다. 결국 전화가 끊어지고 문자가 대신 왔다.
[ㅁㅁㅁ 게스트 하우스 호스트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닌 걸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내쪽에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전화를 못 받았어요.”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제가 지금 육지라서요. 그러니까... 명절이고, 부모님도 보고 싶고, 육지도 그리워서 제가 지금 본가에 와 있거든요. 하하하. 그런데 온라인 예약을 닫아 놓는 걸 깜빡했지 뭐예요. 예약 알림이 떠서 급하게 연락드렸어요.”
‘앗! 예약 취소 인가? 지금 당장 숙소를 어떻게 구하지?’ 나는 숙소 이용이 불가능하다고 연락한 것이라 예상하고 혼자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숙소 주인은 뜻밖의 제안을 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