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 그리고 5일 차
“저희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무시겠어요?”
명절이라 숙소 운영을 안 한다던 숙소 주인은 환불이 아닌 그대로 머물 것을 제안했다.
“명절이라서 당장 다른 숙소 구하기도 어려우실 거 같아서요. 안내해 줄 사람이 없긴 한데 그래도 괜찮으시다면 저희 게하에 머무시는 게 어때요?.”
당장 갈 곳이 없는 내가 숙소 주인의 제안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바로 ‘네!’라고 대답했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했다. 숙소 주인은 도착해서 다시 전화를 달라고 했고 나는 숙소 현관 앞에서 그에게 다시 전화를 했다.
“잘 도착하셨어요? 그럼 지금부터 전화로 안내해 드릴게요.”
“네.”
“문을 열고 들어가시면 정면에 있는 게 숙소 본 건물인데요. 바로 보이는 게 2층이 숙소고, 아래로 내려가서 있는 1층이 카페테리아예요. 정면에 보이는 숙소 방 아무 데나 쓰시면 돼요. 1인 가격만 내셨지만 특별히 통째로 빌려드릴게요. 하하하하.”
얼굴도 모르는 낯선 사람과의 통화가 어색할 거라 생각했는데 다행히 숙소 주인은 유쾌하고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라 길게 전화를 붙들고 있는 게 어렵지 않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있는데 카페테리아인데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 옆에… (중략) 테이블 식기 쓰고 제자리에만 놔주세요.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면 과일이니 야채니 뭐가 엄청 많을 거예요. 사람들이랑 제가 사놓은 것들인데요."
"네네."
"다~ 드셔도 됩니다."
"네?"
"많으니까 가실 때 좀 챙겨 가세요. 제발 가져가 주세요.(웃음)”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설명에 조금 당황스러우면서도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선반을 열면 라면도 있으니 끓여 드시고요. 가스레인지는 부엌 가장 안쪽에 있어요. 그런데 종종 손님들이 가스레인지를 불을 끄는 걸 깜빡하실 때가 있는데...”
“아! 네! 조심할게요. 꼭 두 번씩 확인하고 가스밸브도 잠글게요!”
“아니요. 혹시라도 그래서 집에 불이 나면 끄지 말아 달라고요.”
“네... 네? 에?”
농담이라면 웃음 포인트가 어디인지, 진담이라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지 몰라 말이 나가지 못하고 입안을 방황했다.
“불, 내셔도 돼요. 불이 났으면 좋겠어요.”
“네???”
“싹 허물고 다시 예쁘게 집을 다시 짓고 싶어요. 흑... 화재 보험도 들어 놨거든요! 이제 불만 나면 돼요. 헤헤.”
“......”
그만의 환대 방식이 나를 계속 당황스럽게 하긴 했지만, 어쩌면 불청객이었을 나를 귀찮아하는 기색 하나 없이 친절하게 대해준 것이 더 고마웠다.
“내부는 얼추 설명했고… 다시 대문 밖으로 나가보시겠어요?”
“다시 밖으로요?"
“네, 현관 밖으로 나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있는데 쭉 따라 내려가세요.”
숙소 주인의 안내는 도저히 다음을 예상하기 힘들었다. 안으로 초대를 할 때는 언제고 다시 밖으로 나가라는 말에 황당했지만 일단 고분고분 그의 안내를 따랐다. 그리고 숙소 주인의 말 대로 오솔길을 내려가자마자 나는 ‘우와-’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숙소 주인은 내가 오솔길 끝에 도착할 때까지 많던 말을 거두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환호하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입을 열었다. 아마 곧 내가 볼 감동을 주기 위해 기다려주었던 것 같았다.
“멋있죠? 해지기 전에 보여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거기가 저희 숙소에서 제일 좋은 곳이에요. 베스트 포토존이니 사진도 많이 찍고 편하게 머물다 가세요! 불 나도 끄지 마시고요~”
아침에 일어나니 숙소 주인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숙박비를 더 안 받을 테니 일정에 여유가 있다면 하루 더 머물라는 새로운 제안이었다. 숙소 주인은 서귀포를 소개해주고 싶어서 하는 제안이니 부담 갖지 말라는 말도 함께 했다. 고마웠다.... 아니, 사실 또 경계하고 의심했다. 그동안 많은 경험이 나에게 ‘대가 없는 호의는 없다.’고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 호의에 대한 대가는 불쾌한 것 일 때가 많았기 때문에 날을 잔뜩 세우고 경계할 수밖에 없었다. 강제적으로 행해야 했던 대가 지불은 때로는 금전으로 때로는 노동으로 이자까지 쳐서 강요됐었다. 그 아저씨도, 아버지도, 그 밖에 다른 아저씨들도. 그래서 숙소 주인의 호의가 고마우면서 불편하고, 흥미로우면서 불안했다. 그래거 거절의 문자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음의 결정을 하고 이미 문자도 보냈는데 계속 마음이 쓰였다. 며칠간 제주도에서 경험한 ‘대가 없는 호의’에 나의 습관적 의심과 경계로 놓쳐버린 것들이 많았을 가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노트를 찢어 짧은 편지를 썼다. 어쩌다 제주도에 오게 되었는지, 왜 걷고 있는지 말하기 힘든 얘기를 짧지만 솔직하게 적어 숙소 침대 위에 올려놓고 나왔다. 그의 친절한 제안을 거절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충분했을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한 번이라도 더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숙소에서 나와 반나절 정도 걸었을 때 숙소 주인으로부터 문자가 왔다.
오렴
사는 일에 지쳐 자꾸 세상이 싫어질 때
모든 일 다 제쳐두고 내게 오렴
눈물이 많아지고 가슴이 추워질 대
그저 빈 몸으로 아무 때나 내게 오렴
네가 자유롭게 꿈꿀 수 있는
방하나 마련해 좋고
널 위해 만든 노래들을 들려줄게
네가 누울 때 밤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너를 찾으렴
맘 가져가는 너의 꿈을
다시 빛나게 하렴
- 백창우의 ‘오렴’ -
숙소 주인은 시 한 편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주었다. ‘허락’이었다. 저마다 이 시를 받아들이는 게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허락의 시’였다. 그동안 나에게 ‘회피’나 ‘도망’은 허용되지 않았다. ‘싫어도 참고해야지. 세상에 어떻게 좋아하는 것만 하니?!’하고 스스로에게 매몰차게 굴며 버텨왔다. 그런데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제주도로 도망쳤다. 그것에 부채감을 느끼고 또 문제를 회피한 자신에게 실망을 했다. 그래서 함부로 이것을 ‘여행’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여행? 네가 지금 즐길 때야? 그렇게 문제를 회피하면서 언제 제대로 된 사람이 될 래? 여기서 뭐라도 이뤄내고 가!’하고 자신을 몰아세웠다. 이건 그런 걷기였다. 그런데 숙소 주인이 보내준 시는 이런 나에게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돼!’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런 것 같았다. ‘넌 어디든 갈 수 있고, 쉴 곳이 있고, 뭐든 할 수 있어.’ 하고 허락을 해주는 것 같았다. 한숨이 나왔다. 탄식이 아니라 안도의 숨 고르기였다.
불이 나도 괜찮다고 하더니 이제는 마음 편해져도 괜찮다고 한 번 더 얘기해주는 이상한 숙소 주인. 이렇게 불이 나도 괜찮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어째서 스스로에게 여행이라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박하다. 이렇게 자신에게 박할 수 없다. 나는 언제쯤 스스로에게 유해질까?
소소한 생각 : https://www.instagram.com/kim_patp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