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차
‘이모가~’라고 하셔서 이모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심심해서 그런다며 나를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온 이모님은 시원한 주스도 주시고 유산균 캔디도 한 움큼 더 손에 쥐어 주셨다. 그리고 선풍기 바람까지 나에게 향하게 돌려주셨다. 너무 과분한 대접에 당황스러워 또 괜한 경계심이 올라왔다. 하지만 이렇게 친절을 베푸는 분에게 단호하게 굴 수는 없어 거절하지 않고 받아 들었다.
이모님은 작은 가게에서 할 수 있는 대접을 다 마치셨는지 내 앞에 의자를 끌고 와 앉으셨다. 그리고 통성명도 없이 쫓기는 사람처럼 헐레벌떡 자신이 이야기를 쏟아 내셨다. 아마 내가 금방 일어날 거란 생각에 대화로 붙잡으려고 하셨던 것 같았다. 이모님은 엄마와 비슷하거나 조금 어린 연배로 보였는데,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제주 토박이라고 하셨다. 제주도가 좋지만 지루하고, 육지가 궁금하지만 무서워 한 번도 제주를 떠나 살아본 적이 없다고 하셨다. 제주에서 남편 없이 아이들을 키웠는데 모두 육지로 가서 요즘 적적하고 공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계속될까 봐 걱정이 된다는 말도 덧붙이셨다.
“제사가 없으면 편할 줄 알았는데, 또 그게 없으니 애들이 안 오더라고. 굳이 갈 필요 없으면 안 오겠다고 하는데…... 그래, 오고 가고 돈만 들고 피곤하고 또 3일 뒤면 또 가야 하는데 그치이?”
‘서운하다.’라는 말을 애써 삼키시는 게 보였다. 지나가던 나를 보고는 자식 생각에 반가워 불러다 앉혔지만, 또 자식 생각에 섭섭한 얘기를 차마 입밖에 꺼내지 못하시는 듯했다. 그 모습이 마치 엄마 같아서 티끌만 한 경계심까지 모두 치워버렸다.
이모님과 한 시간 정도 얘기를 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엄마 생각에 잠이 오지 않았다. 엄마, 엄마는 말이 적은 분이셨다. 이번 명절에 집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도 ‘알았다.’라고 한마디만 하고 더 묻지도 않으셨다. 그래서 서운한 쪽은 오히려 내쪽이었다. 평소에도 말이 없고 자주 연락을 하지도 않으셔서 ‘딸한테 무심하네~’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하지만 이모님이랑 대화하고 나서 어쩌면 많은 말과 감정을 삼키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싱숭생숭해 아침 일찍 일어나 떠날 준비를 했다. 이런 땐 걷는 게 꽤 도움이 된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된 참이었다. 떠날 채비를 하고 1층으로 내려갔는데 주인아저씨가 요리를 하고 계셨다.
“2분이면 되니까 이거 먹고 가요. 명절이라서 가게들도 다 닫았을 거예요.”
계란 으깨서 넣은 든든한 샌드위치였다. 방울토마토도 반으로 잘라 접시에 담아낸 모양이 신경 써서 만든 티가 났다. 아저씨는 나에게 접시를 건네고선 다시 주방으로 가서 또 이것저것 챙겨 나오셨다. 점심으로 먹을 또 다른 샌드위치와 감기약이었다. 직전에 머문 최악의 숙소가 추워서 살짝 감기에 걸려 훌쩍였은데 그걸 보곤 일부러 약을 사 오신 듯했다. 고작 하루 머물고 떠나는 사람일 뿐인데 이렇게 섬세하게 챙겨주는 따뜻함에 어쩔 줄 몰랐다. 그냥 감사하다고만 하면 될 것을 호의에 대한 낯선 느낌에 또 그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쨌든 챙겨 주신 것들을 감사히 받아 들고 전날 잔뜩 경계를 해서 죄송하다고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또 인사했다.
경계는 나를 보호하는 첫 번째 보호막이라 생각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동안의 경험들이 그래야 한다고 해서 그동안 그렇게 해왔다. 그래서 상대의 일부만 보고도 잔뜩 움츠러들고 상대를 의심하고 경계해왔다. 어제, 오늘, 제주에서 많은 사람들과 스쳐 지나가면서 문득 ‘아, 나는 어쩌다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그래서 얼마나 많은 것을 보지 못하고 놓쳤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4일째 걷고 있는데 벌써 제주도의 1/3을 걸었다. 한 바퀴를 다 돌 때까지 생각을 정리하자는 목표가 있어서 그런지 ‘아직도 여기야?’하고 갈길이 멀게 느껴지기보단, 아직 끝내지 못한 마음의 숙제에 다른 쪽으로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이번엔 조금 느적느적 걸으며 걷다 쉬다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꽤 시골스럽고(?) 한적한 마을에 도착했다. 그때 확성기의 오래된 전자음이 한적함을 깼다.
“다들 풍성한 한가위를 보내고 계시죠? 내일은 우리 마을 운동회가 있는 날입니다. (중략) 협동 몸빼바지에 출전하시는 분들은 몸빼바지가 준비될 예정이니 따로 챙겨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푸핫-!’하고 웃음이 터졌다. 협동 몸빼바지가 무엇인지 대충 상상이 가는데 어떤 바지를 입고 달릴지 궁금했다. 혼자 키득거리며 웃는 것도 잠시 마을에 외벽을 보고 바로 웃음을 멈췄다. 내가 지나고 있는 마을은 강정마을이었다. 마을 곳곳에는 답답함을 울부짖고, 호소하고 한 흔적들이 보였다. 동시에 폭력의 흔적도 보였다. 다시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그때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왔다.
앞서 말했듯(<나를 쫓아다니는 그림자 정체> 편)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 마누라’가 있었다. 그랬던 거 같다. 아버지는 엄마를 자신의 이상형으로 만들고 싶어 10여 년간 폭력으로써 엄마를 교정하려 했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해가 떨어지면 바로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고, 아침, 저녁 시간을 정확시 지키고, 자신이 허락한 사람만 만나게 했다. 하지만 선천적 모험가인 엄마는 매사 도전적이라 아버지와 늘 부딪혔고 또 그에 굴복하지 읺았다. 결국 긴 투쟁 끝에 이혼으로 ‘남편’이라는 지옥을 탈출했다.
엄마가 떠나고 나는 아버지에게 남았다. 엄마는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그게 언제 일지는 나도 몰랐고, 심지어 엄마도 알 수 없었다. ‘그때’가 올 때까지 나는 아빠와 살아야 했다. 법이 그랬고, 현실이 그랬다. 아버지와의 생활은 지옥 그 자체였다. 어쩌면 아버지에게도 그때가 생에서 가장 최악의 시기였을 것이고, 그 ‘최악의 시기를 지나고 있는 아버지’와 단둘이 산다는 것은 그냥 지옥이 아니라 생지옥이었다.
이혼 후 아버지는 매일 술에 찌들어 살았다. 낮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해 저녁쯤엔 눈이 새빨갛게 물이 들었다. 사천왕 같이 부리부리하고 무서운 눈을 하고 집에 와선 2~3시간 동안 큰소리로 욕을 내지르다가 잠에 들었다. 어느 날은 밖에서 마신 술을 마시고도 설 취했는지 집에서 한잔 더 기울이며 엄마가 남기고 간 육아일기에 무언가 적고 있었다. 빨간 글씨로 욕과 저주를 쓰고 있었다. 그 외에도 많은 것들이 쓰여 있었지만 차마 다 읽을 수 없어 엄마가 사랑으로 담은 나의 유년과 함께 찢어 버렸다. 이렇게 아버지의 술주정은 이렇게 정말 '가지가지'였다. 그리고 그중 두 가지가 지금 내 트라우마의 발단이 되었다.
교정의 대상인 엄마가 사라지자 아버지의 타깃은 나로 바뀌었다. 처음엔 큰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냥 맞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른 것으로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이혼 전에는 내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 것을 강요했고, 그걸 거부하면 핸드폰을 부쉈다. 이혼한 후에도 엄마에게 전화하는 것을 강요했고, 나중엔 나에게 집착하며 한 시간 단위로 전화를 했다.
“어디야?!!”
나중엔 이 단순한 물음이 내가 가장 무서워하고 싫어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술이 나인지, 내가 술인지 모르는 생활을 지속하고 있던 아버지는 양육은 말할 것도 없었고 생계도 소홀히 해 결국 가게문을 닫게 되었다. 집안 형편이 나빠지니 살림을 줄여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초췌해진 아버지와 부서져 낡아버린 살림을 싸서 이사를 한 곳은 방이 2개인 복도식 아파트였다. 그 집에서 나는 복도 쪽으로 창문이 나 있는 가장 작은 방을 썼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때려 부순 흔적들이 사라지지 않아 늘 어수선했는데, 이사를 하면서 버리고 정리하니 깨끗해지고 그제야 사람이 사는 집 같았다. ‘아버지도 이런 집이라면 조금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하고 기대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아버지는 달라지지 않았다. 새로운 술주정이 늘었을 뿐.
아버지는 변함없이 술을 마시고 늦게 집에 오셨다. 차라리 그 편이 나았다. 없으면 당연히 좋았다. 그날도 아버지는 술을 마시느라 자정이 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다음날 학교를 가기 위해서 먼저 잠에 들었다. 잠에 들고 얼마나 지났을까 알 수 없는 기척에 잠에서 깼다. 비몽사몽해 실눈을 뜨고 방을 살피는데 문 밖 복도에서 창문 틈 사이로 아버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