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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쑥채 Feb 18. 2021

나를 쫓아다니는 그림자 정체

3일 차

   새벽 6시, 일찍 짐을 챙겨서 숙소를 나왔다. 같은 방에서 투숙한 외국인 친구들 덕분에 그날 밤 그림자는 보지 않았지만, 잠에 들지도 못했다.

   주인아저씨의 술판 때문이었다. 술판은 밤늦도록 끝날 줄 모르다가 새벽 4시가 돼서야 조용해졌다. 남자 몇 명은 고주망태가 되어 거실에 널브러져 잠에 들었는데 크게 잠꼬대를 하는 소리가 2층 방까지 들렸다. 술에 만취한 사람들이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니 도저히 잠에 들 수가 없었다. 결국 아침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일찍 밖으로 나왔다.

외국인 친구들도 같이 나왔다. 그리고 자전거 도로를 따라 앞으로 먼저 전진했다.


# 아물지 않은 상처 2  


   그날 밤 그림자를 보진 않았지만 검은 그림자에 대한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떨쳐내지 지도 못하고 떨어지지도 않는 이 지긋지긋한 그림자의 정체를  사실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부모님은 이혼을 하셨다. 아버지의 의처증과 폭력 때문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엄마를 때리는 소리를 처음 들었고, 5학년 때는 엄마 몸에 난 멍 자국을 처음 봤다. 그리고 중학교를 막 입학했을 때 아버지 폭력을 직접 목격했다.

   중학생이 되고 ‘이젠 어린아이가 아니야.’라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큰 주먹을 막기엔 나는 아직 한참 어렸다. 그래서 무릎 꿇고 빌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다. 화내지 마시라고 때리지 말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막는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체스판 아래에 고이 모아둔 용돈을 모두 꺼내 엄마 손에 쥐어주었다. 그리고 엄마를 문밖으로 내쫓았다.


“나가요. 나가서 돌아오지 마세요. 안 그럼 엄마 죽어요...”


   하지만 엄마는 3일 만에 집에 돌아왔다. 엄마는 잘 알고 있었다. 엄마가 없으면 아버지의 다음 타깃이 나라는 것을, 아버지가 나에게 어떻게 할지를. 엄마 예상대로 엄마가 없는 3일 동안 아버지는 내 방 문은 부쉈고, 책상을 뒤엎고, 핸드폰은 두 동강을 냈다. 이런 명백한 폭력이 있었는데도 아무도 엄마와 내 말을 믿어주지 않았다. 엄마의 친정조차.

   아버지의 가면은 완벽했다. 배우를 했다면 연기 대상감이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아버지는 가정적이고, 성실한 가장이었고, 가난했던 아내의 집안을 도와주는 착한 형부이자 사위였다. 그래서 모두 아버지의 말이라면 물을 술이라 해도, 콩밭에서 캐온 게 팥이라 해도 믿었다. 아버지는 그 보이지 않는 가면을 쓰고 엄마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바람이나 피우고 다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모두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어쩌면 엄마 편을 모두 없애고 엄마에게 자신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한 아버지의 오랜 계획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모르게 하기 위해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때리고, 옷을 입으면 보이지 않는 곳만 골라 때렸던 것 같다. 결국 내가 알게 되었지만 ‘결국’이 아니라 ‘너무 늦게’ 알게 된 것이다.

   늦어도 너무 늦었다. 내가 아버지의 상습적 폭력을 알았을 땐 엄마는 이미 폭력에 익숙해져 벗어날 방법보다 버티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우리 신고해요.”

“너희를 범죄자의 자식으로 만들고 싶진 않아.”

“그럼 이혼하세요.”

“아빠가 순순히 해주겠니? 그리고 너희를 절대 안 놔줄 거야. 특히 너한테 어떻게 하는지 아는데 내가 너를 어떻게 두고 가니...”

 괜찮아요. 이제 중학생이고... 엄마 먼저 나가서 자리 잡고... 그리고... 데리러 와줘요.”


   엄마는 계속 망설였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빌었다. 제발 이혼하시라고 그래야 나도 살 수 있다고 살려달라고...


빌고 빌어야 하는 빌어먹을 내 삶.
얼마나 더 빌어야 하나...


   엄마는 어렵게 이혼을 결심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정확히는 돈을 빌려줄 사람이 필요했다. 합의 이혼을 해줄  없는 아버지와 같이 맞서 싸워줄 변호사가 필요했고, 거처 문제나 이혼 후에도 자립할  있는 돈이 필요했다. 하지만 엄마의 친정은 임시 거처조차 돼주지 않았고, 엄마의 노동 값은 이미 생활비로 쓰이고 집을 사는데 모두 쏟아부어 남은 돈이 없었다. 엄마의 유일한 재산이라 할 수 있는 집은 아버지가 구렁이처럼 눌러 앉아 있었고, 엄마 가게는 엄마의 아버지인 할아버지가 뺏어가 버렸으니 엄마는 빈털터리나 다름없었다.

   그때 구세주처럼 엄마를 도와준 사람이 있었다. 이혼 전부터 그 전 과정을 흔쾌히 도와준 그는 나중에 엄마와 동업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택시기사 일을 하고 있던 어떤 아저씨였다.



   위자료 없음, 양육권도 못 줌. 그게 아버지가 이혼에 합의하는 조건이었다. 엄마는 결국 그 조건을 받아들였고 1원 한 푼, 옷 한 장도 챙기지 못한 채 쫓겨나다시피 집을 나갔다. 벌거 벗겨져 쫓겨난 엄마를 그 택시기사 아저씨는 본인 일처럼 도와주셨는데, 그 아저씨 덕분에 엄마는 다른 지역에 새로운 거처도 얻고 다시 가게도 열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엄마는 나를 데리고 오고 그 아저씨의 돈을 갚기 위해서 밤낮으로 일하셨다. 낮에는 장사를 하고 새벽엔 시장을 가서 물건을 떼어오며 잠도 밥도 거르고 일을 하셨다. 엄마의 노력에 가게에는 늘 손님이 북적였다. 1년 뒤엔 옆 가게 벽을 허물고 가게를 확장을 했고, 나중에 다른 2곳에 가게를 더 열었다. 일이 바빠지자 엄마를 도와줬던 아저씨도 하던 일을 그만두고 엄마를 도우며 ‘동업자’로 같이 일하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손님들에게 매여 꼼짝도 못 하는 엄마를 대신해 다른 두 가게를 오가며 물건을 나르거나 직원, 가게 현황을 살피고 운전을 대신해 주었다. 처음엔 완벽한 역할 분담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엄마 가게 직원들은 6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그만두었고, 엄마에 대한 이상한 소문까지 돌기 시작했다. 처음엔 갑자기 규모가 커져서 앓는 몸살이라고 생각했지만 모두 그 아저씨의 소행이었다.


“우리 여사장이 좀 그래.ㅇㅇ씨가 이해해줘.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참나...”


   아저씨는 일이 잘못되면 모두 엄마의 실수로 무마했고, 직원과 엄마 사이를 이간질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너희 엄마가 너랑 얼마나 살 거 같냐? 너 대학 가면 멀리 보내고 나랑 결혼하자고 했어.”

“너희 엄마랑 단 둘이 있을 땐 가까이 오지 말라고, 눈치 좀 있어라 간나야.”

“얘를 그렇게 키우면 안 돼. 혼도 내고 안되면 때려서 라도 부모 말을 듣게 해야지. 좀 멀리 보내면 철이 좀 들어서 오더라...”


   아저씨는 엄마와 내 사이도 이간질을 했다. 나는 이 이런 일이 있기 훨씬 전부터 아저씨를 싫어했다. 사람을 가만히 보다가 갑자기 히죽거리며 웃는 것도 싫었고, 껄렁거리는 걸음걸이와 말투도 싫었다. 가장 싫었던 건 ‘간나.’, ‘X간나야.’하고 상스러운 말을 말끝마다 붙이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그를 싫어하는 것을 즐겼다. 내가 인상을 쓰고 싫어하면 오히려 더 히죽거리고 그 행동을 더 크게 반복했다. 거북이처럼 고개를 쑥 내밀고 나를 빤히 보면서. 단순히 싫은 감정은 혐오로 넘어섰고, 그 사람이 가까이만 오면 기분 나쁜 이물질이 몸에 붙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괜한 감정은 아니었다. 그 아저씨는 하는 행동이 꼭 양아치 같았고, 종종 검소 큰 사람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가기도 핬다. 찝찝했다. 엄마가 이상한 일에 휘말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계속 있었다.


   그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아저씨가 한 것은 이간질, 헛소문뿐만 아니었다. 가게 돈에 멋대로 손을 데더니 어딘가에 마음대로 일수놀이를 하는데 썼고 또 도박질을 하는데 썼다. 경찰서를 제 집처럼 오갔고, 엄마는 그 일을 해결하러 다니느라 일 외의 시간에도 바빴다. 그래서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 엄마는 바빠서 옆에 없었다. 검정고시 시험 날에도 대학입시를 준비할 때도. 유학을 떠나고, 돌아왔을 때도 내 몸집만 한 이민가방을 2개를 끌고 홀로 공황을 오갔다. 결국 참던 서러움이 폭발해 아저씨와 일하지 말라고 말하자 엄마는 도와준 은혜와 의리를 외면할 순 없다고 했다.

   나라도 싸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 때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겠다고, 더 이상 무력하게 있지만은 않겠다고 다짐했다. 간절히 원하던 평범한 삶이 코앞에 있는데 물러설 수 없었다. 나는 모든 걸 바로잡기 위해 아저씨의 부당한 행동에 손가락을 굽혀 가며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물건을 부수기 시작했다. 처음엔 주먹으로 쾅! 내리치는 게 다였는데 점점 격해졌다. 무서웠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며 내 두려움에도 맞서 싸우고 버텼다. 그렇게 내가 조금도 꺾이지 않자 아저씨는 내가 키우는 강아지를 바닥에 내던지며 도 심한 폭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래, 너 잘 걸렸어.’ 하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했지만, 또 엄마가 말렸다. 그리고 나는 또 엄마에게 꺾였다.

   나는 방법을 바꿔 아저씨의 나쁜 행동을 비아냥 거렸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장난으로 받아들이고 심하게는 성희롱을 하면서 또 히죽거리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그래서 또 방법을 바꿔 무시하고, 투명인간 취급했다. 사실 상대하고 싶지 않았고, 또 나도 지쳐가고 있었다. 하지만 예상외로 이 방법은 아주 잘 먹혔다. 없는 사람 취급을 하니 부딪히는 일이 없어 폭력을 휘두를 이유를 만들 수 없었고, 눈조차 마주치지 않으니 장난도 성희롱도 하지도 못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약이 올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내가 대면하지 않자 아저씨는 집요하게 연락을 했다. 전화로... 문자로... 엄마와의 연결 통로에 늘 내가 서 있으니 내가 뚫어야 하는 바리케이드고, 넘어야 하는 산으로 여겼는지 집요하게 굴었다. 하지만 나는 모두 무시했다. 몇 년을 그렇게 하니 나중엔 독이 잔뜩 올른 눈으로 나를 보곤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저씨가 내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이 개간나야. 너, 내가 죽어서도 괴롭힐 거야.”



소소한 생각 공유 : https://www.instagram.com/kim_patp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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