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차 또 7일 차
지켜보는 악몽이 없는 간만의 평범한 기상이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지만 가방을 메고 일찍 밖으로 나왔다. 일출을 보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말씀하신 데로 문을 잠그지 않았다. 영 불안해서 떠나면서도 몇 번을 돌아봤지만 잠글 수 있는 열쇠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냥 떠나왔다.
일출을 봐야겠다고 생각한 건 서귀포시청 제 2청사에서 제 1청사로 넘어갈 때 걸려 온 엄마의 연락 때문이었다. 엄마는 내가 정신병원에 가려다가 제주도로 도망 온 것을 몰랐다. 처음엔 명절에 집에 가지 않을 거라고만 했고 나중엔 제주도로 여행을 왔다고 말했다. 시작의 목적은 좀 달랐지만 결과적으로 정말 제주도 여행을 하고 있으니 완전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나의 최초의 계획은 여전히 말할 수 없었다.
“어디니? 많이 구경했어? 맛있는 것도 먹었고?”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한다. 특히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번 여행에 대해선 솔직하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엄마의 물음에 똑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나는 성산일출봉으로 향하고 있었다.
찜질방에 도착했을 때 이미 성산일출봉에 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찜질방에서 출발해 한참을 걸었는데도 일출봉은커녕 큰 바위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내 옆으로 승용차가 씽씽 앞질러 나가는데 괜한 경쟁심이 붙어 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1시간 넘게 걷고 뛰기를 반복했더니 드디어 멀리 성산일출봉 표지판이 보였다. 주변이 환해지고 있어서 벌써 해가 뜬 줄 알고 허겁지겁 올라갔다. 다행히 그날 해는 수면 아래에서 날 기다려 주었다.
감히 평하자면 9월에 늦은 일출은 1월의 일출보다 훨씬 좋았다. 일출을 보기 위해서 꽤 오래 기다려야 하는데 그러기에 딱 적당한 날씨였다. 하지만 이른 새벽부터 꼬박 한 시간을 쉬지 않고 뛰었더니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엄마에게 보내려고 열심히 촬영하던 것을 그만두고 바위에 걸터앉아 쉬는데, 갑자기 자괴감이 들었다. 엄마에게 거짓말을 하기 싫어서 ‘진짜’를 만들고 있는 내 꼴을 보니 참으로 딱하게 느껴졌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것을 하느라 애쓰는 모습에 어쩌면 그동안 상처와 병을 키운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엄마에게 죄책감이 있다. 상당히 큰 죄책감이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여러 번 멀리 보내 버릴 정도로 나를 싫어하셨고, 이혼을 하면 나를 포로로 잡고 놔주지 않을 거란 걸 엄마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혼을 하지 못하고 10년 넘게 아버지의 폭력을 견뎌 오셨다. 나 때문이었다. 아버지의 주먹이 엄마를 향할 때 이유는 다양했지만 나를 원인으로 삼기 좋았고, 그 주먹을 피하면 다음은 나였기 때문에 엄마는 날아오는 주먹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니 엄마에게 죄책감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내가 없었더라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엄마는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갔을 텐데…’ 그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죄책감’이 내 안으로 들어온 후부터 나도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정신적 폭력을 가할 때도 엄마를 위해 아버지와의 생활을 이 악물고 버텼고, 엄마에게 달라붙은 거머리 같은 아저씨가 우리 가족을 음해하고 파탄 내려했을 때도 엄마를 위해 참았다. 갈등을 만들지 않으며 착한 딸이 되려고 안간힘을 썼다. (거머리 아저씨 때문에 일부 실패했지만...) 하지만 착한 딸이 되고자 했던 마음은 점차 나를 병들게 했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후들거리는 손을 부여잡고 일출을 찍고 있는 나를 보고 그것을 깨달았다. 조금 늦었지만 일출을 향해 소원을 빌었다.
‘착한 딸이 아니라 ‘나’로 살게 해 주세요. 이제 그렇게 살래요.’
남을 위해 또 나 때문에 희생하고 헌신한 엄마를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 자신을 위해 살고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이 진짜 착한 딸이 되는 길이었다. 참고 견디다가 이렇게 병든 것을 숨기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소원을 빌고 내려와 나를 위한 호화스러운 음료를 샀다. 커피를 사 먹는 돈이 아깝다는 엄마의 말에 괜히 눈치 보며 늘 저렴한 음료만 마셨는데 그날은 제주도 스타벅스에서 파는 흑임자 프라푸치노를 사 마셨다. 참으로 소박하고 사치스러운 일탈이었다.
고소한 불포화 지방산과 단백질을 마시고 다시 에너지를 내서 걸었다. 그리고 어떤 한적한 마을에 다 달았다. 높은 건물 하나 없는 아담한 마을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밖에 보이지 않았다. 할아버지들이 이발소 앞에 모여 바둑을 두고 계셨고, 할머니들은 유모차를 밀고 나와 낡은 플라스틱 의자에 가만히 앉아계셨다. 그 조용한 마을을 벗어날 무렵 누군가 쫓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차마 돌아보지 못하고 그림자를 살짝 훔쳐봤을 때 나보다 훨씬 크고 우람한 사람이었다. ‘이 한낮에 설마…’하고 생각했지만 섬뜩한 기척에 조금 빨리 걸었다. 그러자 그 의문의 사람도 같이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를 쫓아오는 게 분명했다. 그것이 확실해 지자 나는 좀 더 속도를 냈다. 그러자 나의 속도를 감지하고 그 의문의 사람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뛰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누나!!!!!”
두꺼운 성인 남자 목소리가 ‘타타타타타다.’하는 발소리와 함께 뒤쫓아왔다. 초등학생 때 계주에 나갔을 때처럼 온 사력을 다해 뛰었다. 쫓아오는 공포감에 미친 듯이 뛰어 내장이 한 곳에 몰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뛰다가 어느 정도 따돌린 것 같아 조심히 속도를 줄이고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덩치가 큰 사람이라 금방 지쳐 떨어진 것 같았다. 이제 안전하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너무 놀라 눈물이 핑 돌았지만 그뿐이었다. 호흡곤란이 오거나 트라우마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넋이 나갔을 뿐이었다.
숨이 차서 더 쉬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계속 쫓아와 추월당할까 봐 다시 일어나 걸었다. 그러다가 빨랫줄에 널린 오징어를 보지 못하고 ‘찰싹’하고 부딪혔다. 아직 덜 건조돼서 비린내 나는 오징어 다리가 머리카락에 엉켰다. 덕분에 남은 긴장까지 마저 풀리면서 미친 사람처럼 자지러지게 웃었다.
아, 이제 이런 상황을 가볍게 넘길 수 있게 된 걸까? 조금 웃을 수 있게 된 걸까? 어디선가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인생은 폭풍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이다.
- 비비안 그린 -
내 마음이 나아졌다고 확신하긴 어렵지만 포기해 가만히 있지 않고 뭐라도 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조금은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게다가 다시 어둠에 빠져들지 않고 ‘나 이런 일이 있었잖아.’하고 황당하고 가벼운 에피소드로 취급할 수 있게 된 것에 확실히 성장한 것 같았다. 어쩌면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당히 괜찮아 진걸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즐기며 춤추는 인생은 아니지만 나 대신 바람에 춤추는 오징어를 보고 웃으니 인생을 한 계단 오른 기분이었다.
조금씩 진정한 여행자로 거듭나고 있었다. 독립서점 도 여러 곳 들리고, 기념품샵도 들러 선물도 샀다. 딱새우 정식도 먹고, 당근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아, 안 좋은 기억으로 끝내기 싫어 성게에 한 번 더 도전을 했고 성공적이었다. 성게 국수는 추천할 만한 음식이었다. 또 즉흥적으로 무화과 농장에 들어가 무화과 재배 체험도 했다. 따는 것보다 먹는 게 더 많았지만 그래도 1kg 정도 남겨 그 통을 옆구리에 끼고 나머지 길을 걸었다. 거의 다 왔다.
시작했던 제주공항에 거의 다 달았을 때 ‘드디어 신발을 버릴 수 있겠다.’ 생각했다. 제주도를 한 바퀴 도는 내내 신발이 아킬레스건을 파고들어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하지만 버리지도 못했다. 새로운 신발을 신고 장거리를 걷는 것도 여차하면 전보다 발이 더 혹사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뒤축에 휴지, 밴드 나중엔 생리대까지 붙이며 걸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
나는 5천 원짜리 저렴한 슬리퍼를 샀다. 그리고 나를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그 기분은 마치 어떤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경건했다. 나를 아프게 조이고 있던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자 엄청난 개방감에 환호가 절로 나왔다. 나를 계속 상처 입혔지만 익숙함에 버리지 못했던 신발, 그것은 나의 상처나 기억들이랑 비슷했다. 쉽게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것도 때가 된 듯했다. 오징어와 함께 춤을 출 때가 된 거다. 나는 신발을 주워 들어 마트 안에 있는 큰 쓰레기통 안에 던져 버렸다. 시원하게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니 확실히 신발 말고 다른 것들도 떨궈버린 것 같았다.
완전히 던져 버리진 못했을 거다. 그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다. 하지만 전보다 개운했다. 앞뒤 뚫린 슬리퍼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같은 공항에서 나는 전혀 다른 기분으로 비행기를 기다렸다. 전보다 나아졌음을 확실히 느껴졌다. 나는 좋아하는 무화과 1kg를 짐칸에 싣고 슬리퍼를 끌며 비행기에 탔다.
그렇게 나의 7일 그리고 256km의 걷는 여정이 끝이 났다.
소소한 생각 : https://www.instagram.com/kim_patpa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