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푸레 Mar 21. 2021

사람, 사이의 존재

허은실 시인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중에서


나무와 나무,

너무 가까이 심어놓은 두 그는 잘 자라지 못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늘을 드리우기 때문이죠.

그 그늘 아래선 다른 풀들 역시 성글고 창백합니다.


그러고 보면 숲을 이루는 건 나무들만이 아닙니다.

나무와 나무의 사이,

그 '빈 곳'이 풍성한 숲을 만든다는 걸

헐렁한 겨울 숲은 보여주지요.


사람이야말로 사이의 존재지요.

인간은 사람과 사람의 사이 때문에 인간(人間)이라고 합니다.

그 인간이 던져진 공간(空間)과 시간(時間),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한 세간(世間)이란 말.

모두 사이를 뜻하는 '간'자가 들어 있지요.

'사이'라는 말은 실존의 필연적 조건이기 때문일 겁니다.


사이가 없다면

손과 손은 어디에서 만날까요.

사이가 없다면

당신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어떻게 볼까요.


'사이가 좋다'란 말은

단지 서로 정답고 친하다는 뜻만이 아닐 겁니다.

어쩌면 오히려

'적당한 거리를 마련할 줄 아는 관계'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태양과의 절묘한 거리 때문에 지구에 꽃이 피는 것처럼.



허은실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중

사람,

사이의 존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