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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하 Oct 10. 2021

이별 단상

For Muse #02

소주의 빨간 뚜껑을 연다. 평소라면 맛이 없어 입에 잘 대지 않는 술이다.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적합한 정도이리라. 독한 술을 마시고 싶다. 이보다 더한 독주를.


 남자는 빨간 뚜껑을 만지작거리다 이내 내려놓는다. 한 입을 울컥 삼킨다. 매트리스 아래에 기대앉는다. 국물 요리가 먹고 싶어 주문한 곰탕엔 에어컨의 찬바람이 고인다. 쉽게 숟가락이 가지 않는다. 영 입맛이 없다. 남자는 식어가는 곰탕을 물끄러미 본다.


 둥그렇고 작은 상의 요란한 무늬를 본다. 괜스레 시선을 튼다. 곳곳에 남은 기억을 본다. 자취방 한 구석에 웅크린 기억들이 남자를 본다. 남자가 보고, 남자를 본다. 남자는 다시 왈칵 술을 넘긴다. 들쩍지근한 쓴 맛이 혀에 감긴다. 불쾌하다. 영 불쾌하다.


남자는 소주병을 내려둔다. 이미 미지근한 곰탕에 숟가락을 넣는다. 한 숟가락을 푹 떠 입에 댄다. 적당한 간이 싱겁거나 짜다. 무엇이 스며있어 이런 불쾌함인가. 차마 저녁을 입에 넣을 수 없다. 이건 어스름의 맛이다. 한 밤 중에야 멀어지던 뒷모습의 원망이다.


소주는 벌써 반이 없다. 작은 상은 혼자 차지하기엔 턱없이 넓다. 영 어울리지 않는 자리다. 남자는 병을 들고 비척비척 일어선다. 모니터가 있는 작은 책상. 남자는 푹 의자에 묻힌다. 거울이 남자를 노려본다. 길게 내려오는 앞머리가 눈을 찌른다. 머리를 자를 때가 되었다. 이 머리도 길게 남기라 성화였지. 남자는 작게 소리 내 웃는다. 텅 빈 거울이 남자를 본다.


매달리던 손을 내쳤다. 천장에서 손이 내려오는 것만 같다. 원망의 눈을 단 양 손이 남자의 목을 휘감는다. 꽉 조이는 목에 숨이 턱 막힌다. 술병을 다시 기울인다. 목구멍으로 콸콸 쏟아부어 숨통을 틔운다. 눈을 감은 손이 물러난다. 감은 눈에서 줄줄 물이 흐른다. 조그만 자취방에 물이 한가득이다. 턱 끝까지 차는 물에 남자가 절로 통곡한다. 어스름한 저녁 물러서던 여자의 통곡과 다를 바 없다.


온전히 내칠 의향은 없다. 마음을 놓친 것도 아니다. 단지 쉴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게 전부다. 남자는 고개를 젖혀 숨을 뱉는다. 차가운 공기가 눈에 머문다. 시리다. 술병의 술은 이제 반절도 남지 않았다. 남자는 서둘러 모두 마셔 버린다. 무늬가 요란한 밥상에 던지듯 내려둔다. 다시 숨을 뱉는다. 아주 약간 알딸딸한 기운이 밀린다. 손은 얌전히 천장에 매달려 남자를 본다. 남자도 손을 본다. 문득 그리움이 얼떨떨하게 찾아든다.


웅크린 기억이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기지개를 켠다. 빈 눈으로 남자는 기억을 훑는다. 기억이 남자의 눈을 타고 기어오른다. 하나 둘 기억이 채워진다. 가득 찬 물은 빠지고 손은 자취를 감춘다. 멍해진 눈알이 살아난다. 이럴 정도의 일은 아니었는지도 몰라. 내일이면 연락을 해야겠다. 아니, 집에 도착하기를 기다리자. 남자는 슬쩍 웃는다. 숨이 다시 온전한 제 호흡을 찾는다.


반짝. 핸드폰의 빛이 오른다. 남자는 서둘러 핸드폰을 든다. 여자의 것과는 다른 낯선 문체. 순간 기억은 모조리 몸 밖으로 빠진다. 줄줄 흘러 작은 방 안을 채운다. 어느새 다시 통곡하는 손이 남자의 어깨를 잡는다. 믿을 수 없어, 덜덜 떨며 핸드폰을 귀에 댄다. 신호음이 경박스럽다. 경박하게 멈출 생각을 않는다.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소리샘으로 연결되며, 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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