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궁해도 영혼은 팔면 안 된다

열정이 식을 수는 있어도 열정에는 노화가 없다

by 권소희

6일째다. 아무래도 어제 무리를 한 모양이다. 자고 일어났더니 눈이 뻑뻑하다. 인조눈물을 눈에 넣었다. 그나마 잠을 자기 전에 마사지 크림을 손에 발라 문질렀더니 손가락 관절 통증은 덜하다. 직업병이긴 한데 컴퓨터를 많이 다루는 사람들은 손목과 손가락에 건초염이 걸리기 쉽다. 지난번에 만화를 그리다 6개월 만에 그만뒀던 것도 실은 손가락 통증 때문이었다.


모 방송국에서 방송 프로그램 편성국에서 알바를 한 적이 있다. 마침 팟타임을 구했던 터라 고민 없이 지원했다. 그 일은 한국에서 온 방송프로그램에다가 방송 시간에 맞춰 현지광고를 배열하는 삽입하는 일이다. 특별한 컴퓨터 기술이 필요 없는 단순반복형 업무였다. 컴퓨터 모니터 화면을 바라보며 광고배열이 잘 되어있는지 눈으로 훑는 동작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여야 했다. 법적으로 정해진 노동시간을 지키라는 회사 법칙 때문에 더 일을 하고 싶어도 오버타임을 할 수가 없었다. 오버타임을 허용하지 않은 탓에 그날 일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시간에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경리과에서는 광고국에서 일을 끝내고 못 끝내고는 상관하지 않았다. 광고국 사정을 봐주지 않는 경리과의 압력 때문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그날 방송분량은 그날로 무조건 마쳐야 했다. 무조건. 눈이 삐질삐질 돌아가도록.


쉬지 않고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움직였다. 방송프로에 광고일정이 자동적으로 생성이 되는 소프트웨어가 있긴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프로그램은 없다. 뉴스에 나가는 광고 시간도 다르고 드라마에 허용되는 광고시간도 2분을 넘겨서는 안 된다. 소프트 웨어는 그런 것까지 세세하게 구별할 수가 없다. 자동으로 생성되는 프로그램이 편리하긴 하나 단순편리한 기계의 뒤치다꺼리는 사람 손이 필요하다. 어떤 광고주는 특히 원하는 시간대가 있어 원하는 그 시간에 수동으로 광고를 붙여야 했다. 무작위로 광고가 배열되기 때문에 같은 광고가 두 번 달라붙을 때도 있다. 기계가 엉망으로 배열된 광고를 하나하나 확인해서 다시 재배열을 해야 했다. 처음에는 눈에 익지 않아서 실수로 똑같은 광고가 연달아 나가기도 했다. 일반 시청자들은 그게 뭐 상황인가 하겠지만 그건 광고국 프로그램을 제대로 배열하지 못한 초짜의 실수라고 여기면 된다. ‘신입직원이 들어왔군’ 하고 말이다.

하루 종일 모니터 활자만 들여다보니 오후가 되면 눈앞이 어질어질 했다. 게다가 나는 단순편리한 그 일도 잘 하지 못했다. 시간 내에 일을 마무리 하지도 못했고 광고가 두 개씩 붙은 걸 그냥 지나쳤다. 업무에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사회는 배려심이 없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이 물건끼리 묶고 붙은 건 떼어내면 되는 일이었다. 계산 능력이 필요한 일도, 창조성을 요구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매일 잔소리들을 일들이 생겨났다. 영업사원이 지시한 사항을 수첩에 기록을 해도 그 날짜에 그 광고가 나가질 못했다. 한마디로 나는 그 일에 대한 능력이 없었다. 이까짓 것, 했던 자신감이 점점 사그라졌고 아침에 출근하면서도 오늘은 무슨 실수로 한 소리를 듣게 될까 가슴 졸이며 출근을 해야 했다. 더 큰 속 앓이는 혹, 내가 나이가 많아 순발력이 떨어지는 거였나? 아마도.


이제 기억력이 감퇴가 되고 운동신경이 느려지는 육체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는 나이가 됐다. 메모를 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일쑤고 메모를 했다손 치더라도 메모 자체를 까먹게 된다. 그 일을 몇 개월 있다가 그 일을 그만두긴 했는데 손가락을 혹사한 탓에 지금도 무리를 하면 손가락 관절이 아프다. 노화가 되어가니 제일 약한 부분이 겉으로 드러나는 모양이다. 육체가 늙어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슬픈 일이긴 해도 받아들여야 한다. 의학의 발달로 수명을 늘릴 수는 있어도 연골이 닳아가는 관절과 수분 빠진 목덜미의 주름은 감출수가 없다.


열정에도 노화가 있을까? 열정이 식을 수는 있어도 노화는 없을 것 같다. 그건 다행이다. 돈 몇 푼에 내 꿈을 바꿀 수는 없다. 최상은 아니더라도 최선은 다해보자는 마음이다. 노화는 생길지 몰라도 나이가 주는 지혜는 멈춰야 할 때를 안다는 거다. 어차피 욕심을 내도 굼뜬 몸을 빨리 움직일 수는 없을 테니. 욕심 부리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양을 채우고 마우스를 내려놓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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