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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쏭마담 Jan 31. 2024

아들이 결혼하지 않아도 좋겠어

나는 가장 좋은 시어머니 상!



아이들을 매일 놀이터에 풀어놓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놀이터로 직행했다는 소식이 뜨면, 우리 엄마들도 하나 둘 간식거리를 싸들고 놀이터 정자에 모여든다. 둥그렇게 둘러앉은 그곳엔 순식간에 누군가 쪄온 고구마와 주먹밥과 과일로 한상이 푸짐하게 차려지고... 빽빽거리며 서로를 좇아다니다가 허기진 녀석들이 한 번씩 정자에 들르면 우리는 아이들 입에 간식 하나, 물 한 모금씩을 물려 다시 놀이터로 돌려보냈다. 왁자지껄 쏟아져내리던 아이들의 웃음소리 뒤로 다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작되는 우리 엄마들의 끝없는 수다 수다 수다... 그 시간이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들이 비밀이랍시고 저그들 엄마한테만 털어놓은 내밀한 이야기가 폭로되는 것도 그 시간이다. 요즘 우리 애가 누구에 대해 자꾸 묻더라, 관심이 있는 거 같더라, 반에서 누가 누구에게 고백을 했더라 카는 이야기. 그러다 보면 너네 딸과 그 집 아들에 대한 우리들만의 유쾌한 짝짓기 상상이 이어지고, 이 이야기는 어느새 나중에 우리가 어떤 시어머니가 될 것 같은지에 대해 촌평하는 자리로 마무리되곤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나는 그때마다 동네 엄마들이 사이에서 '가장 좋은 시어머니 감'으로 선정되곤 했다는 사실!

 

왜냐고? ㅋㅋ 내가 제일 아들에게 무관심할 것 같아서란다.


말이야 맞는 말인 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살림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잘하지도 않는다. 먹는 것? 음식에 지나치게 집착하던 시어머니에 대한 반감으로 '해 먹는 일'에 대해 그나마 남이 있던 애정마저 깔끔히 정리했다. 지금 밀키트 사랑에 폭 빠져 있는 걸 보면 나중에 김장을 같이 하자고도, 김치를 갖다 먹으라고도 안 할 딱 그런 시어머니다. 가족모임은 무조건 밖에서 하는 것으로! 나는 며느리네 집 냉장고에 뭐가 들어 있는지 혹 썩어나가는 건 없는지 하나도 궁금하지 않다. 내 냉장고도 알고 싶지 않다. 시댁 식구들 온다고 며느리가 아들을 닦달하며 온 집안을 뒤집고 청소하기도 바라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내가 잠시라도 그런 불편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니, 딱 질색이다. 명절이라고 왜 꼭 한 집에 모여 같이 먹고 같이 자야 하나. 나도 내 집이 편하니, 너희들도 편한 네 집에 가서 잘 일이다. 손주는 딱 3시간 이쁠 때까지만 보자. 아쉽게 만나고 웃는 낯으로 헤어져야 다음 명절에도 또 할머니가 보고 싶지 않겠는가!


이 모든 걸 조합하면 한 문장이 만들어진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며느리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근데 이거 왠지 어딘가 굉장히 낯이 익은걸? 이걸 어디서 들었더라? 아하, 이번 주 주일날 목사님이 설교하신 마태복음 본문이 바로 이 문장이었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 황금률을 살짝 비트니 바로 내 시어머니 상이 된다. 내가 싫은 걸 하지 않다 보면 나도 좋고 며느리도 좋고, 일석이조, 꿩 먹고 알 먹는 황금률이 된다는 이 놀라운 사실!   


그렇다면 신앙심 좋은 우리 어머니 시절엔 이 황금률이 없었나? 아니다. 당연히 있었다. 다만 그때 이 문장에서 '남'이라는 주어에 '나'가 빠져 있었을 뿐. '남' 안에 '여자'가 없었다. '남'의 생각이 남자들의 생각을 대변한다는 걸 몰랐다. '남' 안엔 여자와 남자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는 걸 학교에선 배웠지만, 여전히 이 '남' 안에 여자의 생각과 욕구를 넣어 생각할 줄을 몰랐다. 그래서 시어머니들은  남자들의 생각이 자신의 생각이라 생각했고, 남자들이 대접받고 싶어 하는 대로 남자들을 대접하며 살아야 했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좋은 여자'에 맞춰 살았다. 집안일의 대소사를 관장하며 사는 것이 좋은 여자의 본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일을 잘 해내는 것만으로도 벅차, 여자도 남자들만큼 '바깥일'을, 아니 여자가 남자들보다 어쩌면 바깥일도 더 잘할 수 있다는 걸 확신하지 못했다. 그래서 내 어머니는 명절이면 남자들을 위해 상다리가 부러져라 상을 차리셨고, 세상에 먹는 게 지천에 널리고 다들 다이어트를 못해 안달인 세상인 된 지금도 그렇게 상을 차리신다. 자식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음식으로 표현하신다.  


다행히 나는 이 '남' 안에 이제 '여자'의 욕구와 취향을 반영해야 한다는 걸, 해도 된다는 걸, 이미 많은 젊은 여자들이 하고 있다는 걸 살면서 조금씩 깨달았다. 그러니, '남' 안에 '나'의 욕구를 반영해 본다. 음식 하는 건 나도 재미없고, 남이 우리 집에 와서 자는 건 꽤나 신경 쓰이는 일이니, 나도 하지 않고 며느리에게도 기대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 만나는 게 좋고, 그의 생각을 듣고 이야기 나누는 걸 좋아한다. 그러니 음식 만들어 남자들 대접하느라 발을 동동 구르는 시간에 대신 우리 마주 앉아 충분히 인생을 나누자꾸나, 며느라. 오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시어머니가 될 수 있을 지도?


그래도 방심하지 않는 게 좋겠다. 나의 시어머니도 당시 여자들과 달리 많이 배우고 늘 열린 마음으로 우리를 대하셨지만, 그 시대가 요구하는 현모양처 상을 버리진 못하셨거든. 며느리를 딸로 생각하며 부단히 노력하셨지만 며느리는 딸이 아니란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하셨다. 그러니 나도 꽤나 선각자처럼 굴 때 더욱 스스로를 겸비해야 할 터.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하고, 나는 나이를 먹고 있으니, 내가 아무리 발버둥 친들 내 몸 어딘가엔 지금도 시각각 꼰대 DNA가 쌓이고 있을 것이다. 분명 따라가지 못하고 놓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나는 아들이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데, 그 생각도 고수하는 게 안전할 것 같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들 며느리는 내 아들에게 만족하지 못할 테니, 그럴 때마다 며느리는 왜 아들을 이렇게 밖에 키우지 못하셨나요, 어머니? 하고 남편을 이따위로 키운 나를 적잖이 원망할 거다. 내가 내 남편에게 그랬던 것처럼. 각오하고 있다. 내가 미래의 며느리에게 얻어먹을 욕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침울해진다. 그렇다. 나는 쫄보라 그런 하찮은 이유로도 아들이 나중에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기어이 결혼을 해야겠다고 우긴다면,  그 또한 받아들여야겠지. 다만 며느리 한복치마에 대추와 밤을 던지며 꼭 당부할 거다.


이제 이 남자는 내 것이 아니다. 네 남자다. 네 것이 되었으니, 과거는 모두 잊고(여기에 꼬옥 방점을 찍어야 한다) 이제 네 맘대로 하렴. 나 보다 더 멋진 남자로 잘 만들어 보렴!


아, 나는 역시 회피형 인간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오늘도 쓰면서 또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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