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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18. 2017

내 빈자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





그곳은 내가 가기로 예정돼 있던 자리도 아니었는데. 거기 다녀온 당신은 “니가 없어서…….”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내게 한동안 늘어놓았다. 그 날 그곳에 내가 없어서 이건 어땠고 저건 어땠다며, 당신은 크고 작은 아쉬움을 표했다. 당신은 내가 초대되지 않은 그 공간에서 내 빈자리를 발견한 것이다. 그 당연한 공백으로부터 얼마간의 허전함까지 느꼈다. 


당신 뒷덜미를 스친 그 서늘한 공허감에 대해 전해 듣는 일은, 내게 다양한 감정을 떠안겼다. 최대한 나와 함께이고 싶어 하는 누군가의 진심이 가장 적나라하게 와 닿던 순간이었다. 내가 없는 모든 곳에서 내 빈자리를 찾아내는 사람이란, 자신이 나아가고 머무르는 모든 곳에 내 자리를 마련해 놓는 사람과 같아서. 언제나 나와 함께일 것에 대한 준비와 소망을 넘치게 갖춘 사람과 같아서.


당신 옆에 내가 있어야 뭔가가 더 온전해진다고 믿는 당신을 바라보는 일은, 나로 하여금, 내가 가진 여러 가지 쓸모들을 좀 더 뜻깊게 여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언제든 어디서든 나로부터 유익을 얻고 마는 당신 곁에 살아 있는 일은, 나로 하여금, 내 안의 가치가 매 순간 유효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도와주었다. 






당신 근처를 서성거리며 당신 삶과 내 삶을 쉼 없이 맞대고 있는 동안, 나는 내 생에 의미 없는 시간은 단 하루도 없다는 점을 온 영혼으로 절감했다. 당신을 통해, 나는 나 스스로에게서 의미를 추출해 내는 법을 배웠다. 나라는 한 존재의 중요성에 대해 진중한 태도를 지니는 법을 배웠다. 


나와 눈동자를 마주치고 있는, 1초도 안 되는 그 찰나 속에서도 당신은 나로부터 커다란 안정을 취했다. 그런 당신이 있어, 나는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당신과 세월을 길러 나가는 일이 어찌 당신만의 행복인지. 오히려, 당신을 선물처럼 얻은 내가 끌어안은 행복이, 나로 인한 당신의 행복보다 훨씬 큰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가 당신 덕에 끌어안은 건, 행복이기 이전에 내 존재 자체인지도 모른다. 당신이 없었더라면, 내가 나를 언제 한 번 다정하게 보듬어 보았을지. 그런 극적인 장면은 영영 연출되지 않았을지도.     






누군가와 죽이 잘 맞는 한 쌍이 되어 살아가는 모든 나날이 얼마나 값지고 건강한지, 나는 감히 측정해 낼 수 없다. 사랑은 위대하다는 말 쪽으로 귓등도 가져다 대지 않던 내가, 지금은 위대함 옆 또는 위에 사랑을 놓는다. 사랑 같은 건 없다거나 사랑은 보잘것없다는 단정 모두, 아직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다.


사랑에 대한 복잡하고 허황된 기대를 내려놓고 나서야, 나는 당신과 당신 안의 사랑 그리고 내 안의 사랑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 싹튼 사랑을 차츰 확장시켜 나갈 수 있었다. 당신을 향해 있던 사랑은 나에게로 향하기 시작했고, 나에게로 향한 사랑은 또 다른 사람에게로 향하기 시작했고, 또 다른 사람에게로 향한 사랑은 세상에게로 향하기 시작했고, 세상에게로 향한 사랑은 모든 것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사랑은, 살아가는 순간들과 함께하는 사람들이 자꾸 예쁘게 보이고 고맙게 느껴지는 일 이상이 아니었다. 그 이상에 존재하는 기쁨은 없으므로, 그 이상의 자리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지지도 않는 것. 거창하다고 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터지게 충만한 것.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데, 이미 모든 말들의 훌륭한 뜻을 한데 뭉쳐 놓은 것. 계산 없이 꺼낸 마음 말고는 따로 더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온 세상이 가득 차 버리는 것.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릴 때에야, 진짜 사랑의 윤곽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뭔가를 받아야 사랑이거나, 뭔가를 주어야 사랑이거나, 뭔가를 맹세해야 사랑이거나, 뭔가를 포기해야 사랑이거나, 뭔가를 바꾸어야 사랑이거나……. 그냥 주어진 것들에 순수한 감사를 느끼고, 받은 은혜에 보답을 하고 싶어질 때부터가 사랑인데. 그렇게, 가진 좋은 것들을 베풀고 베풂 받으며 쌓이는 감사에 감동하는 날들이 사랑인데.






ㅡ 산문집 『가치에 대한 이야기』:

http://www.bookk.co.kr/book/view/24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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