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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이로운 Sep 25. 2019

타고난 능력과 끈기 중
하나를 택하라면

     

어젯밤 내 꿈에 나를 찾아온 사람은 나에게 수많은 선택지를 주었다. 이것과 저것 가운데 굳이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신은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는 하얀 글씨들이 적힌 남색 종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그 종이의 앞뒷면을 확인했다. 다양한 항목들이 종이 앞뒤에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각 항목 옆에는 네모난 빈칸이 있었다. 빈칸의 테두리 또한 하얀색이었고, 빈칸 안은 종이 색과 같은 남색이었다. 


나는 하얀색 잉크가 나오는 펜으로 내 마음에 드는 항목들 옆 빈칸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내 앞에 우뚝 선 그는 헛기침을 하거나 숨을 크게 들이켜며 나를 지켜보았다. 그가 입고 있던 진회색 재킷이 펄럭일 때마다 원목 향기가 이쪽으로 흘러들었다. 향수에서 나는 향기가 아닌 듯했다. 


나는 그가 계속 침묵을 지킬 줄 알았다. 

“이 부분은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그가 별안간 정적을 깼다. 나는 ‘타고난 능력’과 ‘끈기’를 번갈아 보고 있었는데. 그는 본인 옆에 놓인 의자에 조용히 앉더니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설명을 좀.”


“무슨 설명요?”


말을 오래 안 했는지, 잠긴 목소리로 내가 그렇게 물었다. 그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내 앞의 종이 쪽으로 눈짓하였다. “이번에 고를 항목에 대한 설명. 왜 그걸 골랐는지에 대한 개인적인 이유를 좀 듣고 싶은데요.


나는 다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타고난 능력’과 ‘끈기’라는 단어가 아까와 좀 달리 보였다.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달리 보이는지에 대한 분명한 인지는 없었다. 타고난 능력과 끈기가 적힌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부연 설명이 달려 있었다(모든 항목 밑에 부연 설명이 달려 있었다). 



‘좋아하는 것을 선천적으로 잘하는 사람이 있고,
좋아하는 것을 오래도록 근성 있게 하는 사람이 있죠.
당신은 어느 쪽이 좋은가요?’     







“딱히 고민할 필요 없는 문제라서요, 이게.”


나는 그렇게 운을 뗐다. 그는 꼬려던 다리를 도로 풀고 정자세로 앉아,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내가 고른 것은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끈기였다. 그걸 고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내가 어떤 일에 대한 엄청난 능력을 타고났다 하더라도, 그 일에 정 붙이지 못하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오래 해 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좋아하는 뭔가를 오래 할 수 있는 끈기가 나에게 있을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끈덕지게 지속하며 나 자신을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 내가 내 인생에서 추구하는 것은 단순한 성취가 아니라 행복이다.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


대단한 성취 그 자체에서 궁극의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는 ‘성취나 역량 그 자체에서 오는 행복’보다 ‘자기 역량을 발휘해서 무언가를 즐겁게 할 때 오는 행복’을 더 상위의 행복으로 친다.


둘째. 좋아하는 일을 끈기 있게 하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일을 잘하게 된다. 그에 더불어 자기만의 스타일도 확립하게 된다. 어떤 일을 뚝심 있게 해 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그 일에 자신의 고유성을 담게 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일에 자신의 고유성이 저절로 배어든다. 자기 색깔이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끈기 있게 일하는 사람은 그 일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발견하게 되고, 그 개성을 세상에 보여주게 된다. 일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일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산하는 사람은 대체 불가능한 인재가 된다. 우리는 교육을 통해 단순한 능력 향상만을 추구하게 되는데, 정작 우리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뭔가 특별한 걸 가진 사람’이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측면을 파고들어 혁신을 이루어 내는 사람. 그런 사람이 사회를 발전시키고 이끌어 나가는 훌륭한 재목(材木)이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다. 정해진 틀 속에 들어가 있기를 평생 가르치는 사회를 문득문득 성장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은, 과감히 틀 밖으로 나가 새로운 뭔가를 발견한 사람들. 거기서 새로운 뭔가를 즐겁게 시작한 사람들.  



누구든 한 발 앞으로 나아가려면 

기존에 있던 곳을 벗어나야 한다.

누구든 한 층계 위로 올라가려면

기존에 머물던 층계로부터 이탈해야 한다.

자신만의 일을 하는 사람은 

남들이 그 일을 하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하지 않는다. 

그 탈선은 그 사람을 

유일무이의 존재로 거듭나게 만든다.

그 탈선으로 인해 그 사람은 

그 사회에 새로운 기회를 안겨다 준다.

새로운 문을 열어 준다.







나는 내가 내 일을 통해 나 자신의 개성적인 면들을 자꾸 발견했으면 좋겠다. 그걸 가지고 나답게 성장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안이 차올라 있는 삶을 가졌으면 좋겠다. 사람으로 태어나 일이 되는 삶 말고. 사람으로 태어나 ‘그 누구도 아닌 특별한 한 사람’으로 자기 내면을 채우는 삶을 가졌으면. 남들 다 그리는 그림 말고, 나만 그릴 수 있는 그림을 그리는 삶을 가졌으면. 


그래서 끈기를 골랐다. 사람이 뭔가를 쉽게 단념하지 않고 끈질기게 버티는 기운을 일으킨다는 것은, 그 사람이 자기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 같아서. 내가 어딘가에 끈기를 발휘할 때마다 나 자신이 생생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던 기억들이 떠올라서. 


나는 세상을 이루는 기술의 일부가 아니라 세상을 채우는 사람의 일부로 살다 가는 편이 좋다. 남들보다 더디거나 모자란 부분이 있다 하여도. 살다가 가고 싶다. 살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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