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마음먹으면 언제나 시작하기 전부터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죄스러움이 밀려온다. 아버지는 나의 학창시절엔 밝히고 싶지 않은 치부였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모든 불만의 근원이었고, 좀 더 나이를 먹어서는 안타까움과 미안함으로 다가오는 그런 사람이다.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고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에 평생 보통 사람으로 살아갈 운명인 사람. 자식에게 미안해하며 인정받지 못한 인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 내 아버지.
가장 오래된 추억을 말해보라면, 나는 주저 없이 아버지의 포니택시를 이야기할 것이다. 동네 골목길 셋방 앞에 주차되어 있는 녹색의 회사 포니택시. 회색 벽돌집 사이의 회색 골목길 사이에서 녹색 빛깔의 택시는 유난했다. 당시의 나는 그 물건에 전혀 관심도 없었고 일말의 흥미도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도 특별한 흥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맞겠다. 어머니의 말을 빌리자면 골목길에서 세차를 하다가 주인집에 많이 혼났다고는 한다. 아버지가 그 차를 애지중지한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지만, 언제나 그 일에 열심이긴 했던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우스꽝스러운 고깔을 달고 있는 택시를 운전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택시는 아버지의 인생을 함께했고, 또 그 자식의 인생을 함께했다. 어쨌거나 나의 아버지는 택시기사였다. 그 낙인이, 나를 괴롭게 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아버지의 회사를 방문하는 숙제가 있었다. 회사에 찾아가 자신의 아버지가 하는 일을 견학하고 발표하는 과제였다. 아버지는 회사로 찾아간 자식을 굳이 뒷좌석에 태우고 영업을 하셨는데 손님들이 그다지 반기진 않는 느낌이었다. 빈 택시인 줄 알고 탔는데 생뚱맞게 꼬맹이가 앉아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어린 마음에도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나는 멀미를 핑계로 얼마 못 가서 내리고 말았다. 멀미가 나는 것도 사실이긴 했다. 회색으로 칠해진 서울 한복판을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이 어지럽고 답답했으니까. 다음날 학교에서 발표를 해야 했는데 내 차례가 돌아오지 않길 간절히 바랐다. 친구들의 아버지가 대단해서 비교되었기보단, 나의 아버지의 직업을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땐 그게 부끄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커가면서 생각한 건, 어린 날에 아버지의 직업을 비밀로 한 건 잘한 결정이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버지가 택시기사를 한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라 믿게 해줬고, 막상 당신 역시 택시를 운전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 왔으면서도 아직까지도 아버지가 택시 운전을 한다는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 택시와 연관된 범죄가 뉴스에 나올 때면 그것마저 부끄러웠고, 사람들이 택시에 대한 불만을 얘기하면 죄지은 사람처럼 조마조마하며 얼른 이야기의 주제가 바뀌길 바랐다.
아버지는 내가 본 평생을 택시 운전을 하며 살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아버지의 직업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말해왔다. ‘운전하는 일은 하지 말아라, 밤을 새는 일은 하지 말아라. 나는 운전을 하지만 너는 나를 딛고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해라.’ 나는 아버지를 딛고 살아왔으면서도 그 말을 납득하지 못하고 아버지를 탓해왔다. 왜 이렇게 살았냐고. 왜 이것밖에 못했느냐고. 그런 아버지를 비난하며 내 게으름과 무능함을 그에게 덮어씌우고 힐난하기도 했다.
세월이 여러 번 지났어도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알게 모르게 서먹함이 남아 있다. 말로는 다 풀 수 없는 세월의 타래가 많이도 엉켜서 남은 평생에 다 풀어낼지 모르겠다. 이제는 서로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를 자극하지 않는 정도로만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면서도 나는 그것이 효도라 믿으며 애써 덮어놓는다. 그러다 가끔 아버지를 연상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면 이유 없이 복받쳐 오르기도 한다. 이를테면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들으면서 나는 다른 이들의 아련한 마음과는 전혀 다른, 뜻 모를 괴로움이 치밀어 눈두덩 언저리가 발갛게 달아오른다.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아니었지만 나의 어린 날의 이야기와 너무 닮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