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댁에서 친척들이 다 같이 모이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무렵이었나. 옅어질 대로 옅어져 흔적만 남은 끈을 억지로 이으려고 그랬는지, 친척들은 일 년에 한 번은 모임을 가졌다. 나는 이름마저 어색한 사이에 끼어든 죄로 며칠이나 시골에 머물러야 했고. 물론 철없던 시절엔 그게 나름의 재미였지만. 저녁만 되면 불빛이라곤 보기 힘든 깡촌에서 친척 형들을 따라다니는 일은 즐거웠다. 그러다 어른들이 밥 때를 알리면 또 우르르 몰려가 밥을 먹은 기억도 제법 괜찮은 추억이고.
날이 저물면 어른들은 안방에 둘러앉아 화투짝을 돌렸다. 술을 좋아하는 삼촌들이 언제나 취해 있던 탓에 술 냄새를 싫어하는 나는 삼촌들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한번 시작된 화투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이어졌는데, 그럴 때면 마루에 놓인 모기향을 바라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돌돌 말린 모기향에서는 매캐한 쑥 태우는 냄새 같은 게 났다. 풀벌레는 밤새도록 울어댔고, 밤하늘은 정지된 것처럼 고요했는데, 모기향 타고 남은 재만 조용히 쌓여갔다. 모기향과 풀내음이 섞인 밤의 냄새는 어린 날에도 그렇게 가슴 설렜다.
그러다 하루는 형들이 모기향에 취해 있는 나를 데리고 나왔다. 오 분도 안 되는 거리의 삼촌네 집으로 간 형들은 냉장고를 뒤지다 맥주 한 병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나눠 먹었다. 술은 어른들이나 마시는 거라 믿던 천진했던 시절에, 한 모금 마셔 볼 생각도 못하고 나는 그길로 외할머니 댁으로 도망쳐 왔다. 코를 찌르는 알콜 냄새가 싫었으니까.
외할머니 댁에 도착해서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어른들은 나에게 왜 안 자고 돌아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거렸는데, 말하면 형들이 혼날 거란 마음에서 그랬던 것 같다. 내가 혼날 일도 아니었는데 그땐 왜 그랬는지. 영문을 모르는 친척들을 대신해 이모부는 함께 자러 가자고 나를 이끌었고, 당연히 나는 싫다는 투정을 부렸다.
술 냄새가 싫어서 도망쳤는데 다시 거길 가자니.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투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원래 고까워했었는지, 이모부는 내 아버지에게 자식 교육을 잘못했다고 하더라. 이모네 형들이 술을 마셔서 도망 왔다고 말할 걸 그랬다. 우리 아버지가 자식 교육 잘못 한 게 아니라고 말할 걸 그랬다.
억울했던 기억까진 확실한데, 그 다음은 기억나지 않는다. 속상하고 충격적이었던 그 밤에, 아버지는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집으로 향했다. 이모부와 다퉜는지, 나였는지, 아니면 어머니와 다퉜는지 잘 모르겠다. 속상해하는 나를 달래주면서 내가 왜 그랬는지를 알아준 것도 같은데. 아버지는 가족이 가장 소중하다는 말을 해준 것도 같은데.
그 후로도 나는 꾸준히 이모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그러다 이모부가 세상을 떠나신 후로 영영 못 보게 되어 버렸다. 내가 알기로 이모부는 마지막까지 진실을 몰랐고, 끝까지 나와 서먹했다. 그리고 이제는 탓할 상대도 없는 기억만이 남았다. 허무한 기억을 곱씹으며, 나는 왜 아버지에게 믿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을까 싶다. 그때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게 버릇이 된 건지 아직까지도 나는 고맙다는 말은 못하고 후회만 반복한다.
생각해 보면 아버지와 나의 관계는 대개 이런 식이었다.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나는 말하지 못한다. 이게 부자 간 인연의 한계인지, 아니면 초월적인 믿음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내가 다 알게 될 때까지는, 고맙다는 말을 못한 채로 함께 살길 바라고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