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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희 Jul 09. 2021

체력은 닳는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단련해서 총량을 늘리는 것

유난히 피곤한 날엔 운동을 가기 전에 100번쯤 고민하게 된다. 가지 말까. 한 번만 빠질까? 그래도 있는 힘껏 조금 기운을 내서 집을 나서고, 운동 매트 위에 올라서게 되면 어찌저찌 또 한 타임의 운동을 끝내게 된다. 그렇게 심적 갈등이 유독 깊었던 날이면 오히려 운동을 다 하고 나선 뿌듯함이 더 큰 편이다. 역시, 하길 잘했다. 하면서. 


그렇게 하기 싫음과 해야 함의 선택지를 왔다 갔다 하면서, 하기 싫어도 끝끝내 운동을 끝내고 났을 때 찾아오는 만족감은 꽤 컸다. 그리고 그런 날들이 반복되어가며 어느새 나에겐 습관이 붙었고, 작고 귀여웠던 체력도 조금씩 커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필라테스 학원 매트 위에서, 내가 매번 실패하던 한 자세가 이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잡혔다. 노력해도 잘 안 되던 자세여서 내 타고난 유연성이 부족한가 보다 했던 한 자세가 그날은 갑자기 잘 되는 것이었다. 아 이렇게 하는 거였구나, 몸소 느껴졌다.


아마 그렇게 잘 되지 않던 한 자세가 어느 날 문득 된 이유는 그 이전에 숱하게 실패했던 시간들과, 잘 되던 쉬운 다른 동작들을 하며 생긴 근육과 요령이 쌓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매번 운동 후 여기저기 당기고 아팠던 근육들이 조금씩 조금씩 그 자세가 가능하도록 단련되었을 생각을 하니 뿌듯했다. 


가끔 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한 종류의 역량은 어쨌든 총량이 있을 거란 생각. 체력에 대해서라면 내게 있는 체력의 총량도 정해져 있지 않을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내 머릿속에서 체력은 언젠가 점점 닳아 없어질 거란 이미지로 다가왔고, 내 총량 안에서 '적당히' 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더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딱히 없었고, 그래서 잘 되지 않는 자세들에 대해서도 기대치가 낮은 상태였다. 워낙에 체력이 약한 편이니까 그나마 관리를 해야지 하는 생각 정도로 임해왔다. 


그런데 꾸준히 필라테스를 나가게 되면서, 잘 따라 하지 못했던 자세들이 조금씩 쉬워지면서, 작은 매트 위에 누워 문득 내 생각이 완전히 틀린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총량은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늘릴 수 있는 거구나. 


그리고 이건, 내가 그동안 고민해오던 다른 문제에도 해답이 되어 주었다. 업무 상 무언가를 쓰거나 기획해야 하는 에디터인 나는 어떤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다른 일에 대한 내 역량이 떨어지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늘 있었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에도, 이 일에 쏟게 될 에너지 때문에 내가 혹시 본업에 소홀해지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생겼다. 또 반대로는 돈을 벌기 위한 글을 쓰느라, 내가 진짜 쓰고 싶은 글은 못 쓰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따라왔고. 이 두려움과 걱정은 어쩌면 보이지 않는 영감에 총량이 있을 거란 환상이기도 했던 것 같다.


막연하게 내 능력치나 영감에 한계를 정해두면서, 내가 A를 하면서 소진되면 B는 못할 거란 생각. 이건 B를 실패했을 경우 좋은 핑계가 되어 줄 수도 있을 논리였다. 


그런데 운동을 하면서 내 체력의 총량이 있을 거란 생각이 얼마나 안일한 핑계였는지 몸소 깨닫고 난 후, 일을 대하는 태도도 조금 달라졌다. 생각해보면 어떤 일을 하면서 단련한 능력은 다른 일을 할 때의 단단한 지지대가 되어줄 때가 더 많았다. A를 하며 얻은 요령이 B에도 쓰이고, B를 하며 배운 방식이 또 C를 할 때 다시 이어지는 식으로 말이다. 필라테스에서도 처음엔 어려웠던 동작들을 꾸준히 하며 조금 더 자세가 나아진 것처럼. 


잘 되지 않았던 동작을 완벽하게 해낸 날, 나는 기분 좋게 운동 매트 위에 누워 천천히 숨을 골랐다. 하기 싫어도 좋아도 해나가는 매일의 시간들이 한정된 자원으로 날아가는 게 아니라 어딘가엔 분명히 쌓일 거란 생각에 내 마음은 조금 여유로워졌다. 


당장은 닳아서 없어지는 것 같더라도, 아무리 해도 안 될 것 같더라도, 딱히 이거랑 저게 상관이 없어 보이더라도. 그 모든 착각의 굴레에서 벗어 나와 그냥 또 묵묵히 해보자고. 언젠가 구석구석 닦아 두고 쌓아둔 것들이 넉넉하게 빛나고, 여기저기서 발휘될 모습을 상상하며. 오늘도 닳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단련하는 마음으로 지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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