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적당한 실망
북적이던 손님의 행렬이 끊긴 뒤의 카페는 낯설게 조용했다. 오후 네 시 반. 체력적으로도 조금씩 지치는 이 시간엔 꾹꾹 눌러두었던 무거운 기분들이 바닥을 긁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오늘 하루 동안 쏟은 말들과 미소들, 진심이었는지 가식이었는지 애매한 감정들의 잔향이 서정의 몸에 붙어 있었다.
그녀는 카운터 안에 기대어 창밖을 보았다. 카페 앞 가로수 잎이 조금씩 시들어가고 있었다. 여름이 이기고 간 자리였다. [온기]에서 일하기 시작한 이후, 서정은 시간의 변화에 더 민감해지는 자신을 발견했다. 감정에 대해 아주 예민한 감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곳이 일터였기에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게다가 상사는 더욱이 감정을 온도, 향기, 촉감 등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읽어내는 능력과 읽어 낸 감정을 완벽한 디저트 한 그릇으로 뚝딱 만들어내는 기민함을 고루 갖춘 사람이었다. 완벽해 보였다. 동시에 서정은 아직은 자신의 부족함을 떠올렸다. 이렇게 지치는 오후만 되어도 감정의 소용돌이를 가볍게 컨트롤하기 어렵다는 것이 속상했다. 누군가를 담담히 위로하기에 서정은 자신의 감정은 더 무겁고 크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정이 힘 없이 한숨을 쉬며 카운터 아래 찻잔 정리를 하다가, 무심코 물었다.
"점장님은 감정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알아차려요? 손님 말도 안 들어보고 그냥 그 사람한테 무슨 감정이 있는지 바로 알아채는 것 같아서 신기해요."
설은 대답 대신, 벽 쪽으로 나 있는 작은 수납장을 열었다. 낡고 녹슬어서 눈에 띄지 않았던 철제 손잡이를 돌리자, 안쪽에서 서랍장이 하나 밀려 나왔다. 무게감 있는 철제 서랍장이었지만, 가장자리는 황동빛으로 칠해져 있었고, 서랍마다 손으로 쓴 라벨들이 붙어 있었다. '후회', '허무', '질투', '자기비하', 그리고 서정이 처음 보는 생소한 감정의 이름들까지.
"이게 제가 만들어 둔 감정 재료 서랍장이에요." 설이 말했다.
"재료요?"
"감정은 조리되지 않은 상태에선 모호하고 복잡하죠. 손님이 오기 전, 공기 중에서 먼저 느껴져지기도 한달까요. 냄새 같기도 하고, 소리 같기도 하고.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을 저는 디저트를 통해 구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도와주는 거고요."
서정은 조심스레 다가가 서랍장을 들여다봤다. 어떤 서랍엔 갈색 유리병이, 어떤 곳엔 반투명한 봉투나 색이 바랜 말린 재료들이 담겨 있었다. 감정 재료 서랍장의 라벨은 눈으로 가늠하기 어려울만큼 많고 복잡해 보였다.
'나무 선반 위 있는 유리병들은 이 중에서 잠시 실온 보관이 필요한 것들이 나와 있던 것이었구나.'
밖에 꺼내 두었던 몇 가지 감정 유리병들이 전부인줄 알았던 서정은 설에 대해 존경심이 생겼다.
설은 '기대'라고 적힌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반쯤 익은 홍시 미니어처가 하나, 부드럽게 감싸진 망에 들어 있었다.
"기대는 금방 무르잖아요. 그래서 감정 중에서도 상하기 쉬워요."
"오늘의 디저트 메인 재료였던 홍시구나! 그럼, 솔잎 설탕은 어디서 온 거에요?"
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또 하나의 서랍을 열었다. 서랍의 라벨엔 [무력감]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써 있었다.
서랍을 열자 그곳엔 길게 말린 솔잎이 유리관에 담겨 있었고, 그 옆엔 솔잎을 추출해 만든 투명한 시럽과 반짝이는 결정 설탕이 들어 있었다.
"무력감은 희미한 기대가 녹아내린 자리에 남는 감정이에요."
서정은 아직도 어려운 느낌이었지만,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한가득이었지만 입을 떼려는 순간, 문이 열렸다.
한 남자가 들어섰다. 셔츠 소매가 조금 구겨졌고, 손에 들린 종이봉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여기가 디저트로 감정을 위로해준다는 그곳 맞나요?"
서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오늘의 디저트로 준비해 드릴게요."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 앉았다. 어깨는 작은 곡선을 그리며 축 쳐져 있었고, 지친 눈동자에는 생기가 하나도 없었다. 앉은 자세만으로도 지친 하루가 그대로 전해졌다.
설은 익숙하게 디저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홍시는 하루 전에 미리 껍질을 벗겨 냉장 숙성해두었고, 솔잎 설탕은 감정 서랍장에서 꺼낸 유리병에 들어 있었다. 은은한 향이 퍼지고, 서정은 조심스럽게 토치를 건네며 물었다.
"손님이 너무 지쳐 보이네요."
설은 바삭하고 노릇하게 토치로 설탕을 녹이며 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맛을 선물해 줍시다."
잠시 후, 그릇이 손님 앞에 조심스럽게 놓였다.
남자는 마치 낯선 유물을 다루는 듯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디저트를 받았다. 손끝이 약간 떨렸다. 남자는 디저트를 한참을 바라보다가, 스푼으로 조심스럽게 겉면을 눌렀다. 부드러운 소리와 함께 캐러멜라이징된 겉면이 깨졌다.
"이건…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요."
그가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제 안에 남아 있던 기대가, 여기에 담겨 있는 것 같아요. 다 타버린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서정은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려 조심스럽지만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 기대가 없어도 살 수는 있지만, 없으면 아무 맛도 안 나죠."
남자는 잠시 멈칫했다. 그 말이 꽤 오래 가슴에 머무는 듯했다.
"전, 요즘 하루를 시작하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출근하면 내가 거기 왜 있는지 모르겠고, 일 끝나면 다 끝나서 허탈하고… 반복적인 일상은 아무 변화도 없고요. 그냥 계속 참고 있었는데, 그게 습관이 되더라고요. 아무 말도 안 하고, 아무 생각도 안 하는 걸로요."
서정은 그 말에 마음 한 켠이 저릿해졌다. 그녀도 비슷한 감정을 알고 있었기에.
"그럴 땐… 나한테 실망하는 게 제일 괴로운 것 같아요. 누구 탓도 못 하고, 괜히 내 탓만 하게 되고. 제가 너무 말이 많네요. 제 이야기 같은 건 별로 궁금하지도 않으셨을 텐데…"
"아니에요, 남들한텐 말 못 하는 감정들도 여기선 괜찮아요. 저도 아직 익숙하진 않지만요."
남자는 그 말을 듣고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그러다 다시 홍시 크렘브륄레를 한 스푼 떠 입에 넣었다. 따뜻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졌다. 그는 눈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
"그래도… 내가 아직 이런 맛을 느낄 수는 있다는 게 좋네요."
설은 남자의 말에 작게 미소지었다. 아주 희미하게.
그 말은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버티는 데 충분한 진심이었다.
카운터 너머에서 설이 조용히 그 말을 듣고 있다가, 감정 서랍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대' 라벨 옆에 반쯤 열린 또 하나의 서랍. 거기엔 조금 긴 감정의 이름을 적어 두었다.
[다시 기대할 수 있게 하는, 적당한 실망]
손님이 떠난 후, 마감 정리를 하며 감정 재료 서랍장에 새로 적힌 라벨을 본 서정은 속으로 천천히 되뇌었다. 어쩐지 그 말은 자기 자신에게도 필요한 문장 같았다. 완전히 낙담하지 않도록, 아주 조금만 실망하는 법. 다 타버리기 전, 다시 무언가를 상상할 수 있게 만드는 잔열은 그녀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오늘 오후만해도 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스스로 의심이 들던 서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감정 서랍장 전체를 바라봤다. 언젠가는 이 감정들 하나하나를 스스로 다룰 수 있을까. 단순히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만들고 해석하고 완성해내는 사람으로서.
문득, 자신의 마음속에도 이름 붙이지 못한 감정들이 여럿 떠올랐다. 너무 사소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감정들. 잊히고 있었지만 여전히 무겁게 남아 있는 그런 마음들.
서정은 조심스럽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도, 내 감정에 이런 섬세한 이름들을 붙여볼 수 있을까…'
가게 안으로 오후 다섯 시의 붉은 햇살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햇살 속에서 감정 서랍장의 황동빛 손잡이가 은근하게 반짝였다.
온기의 디저트 레시피
들여다 볼 감정 : 무력감, 기대
숙성된 홍시 2개(껍질을 벗겨 과육만 사용)
달걀 노른자 3개
생크림 200ml
우유 50ml
바닐라빈 또는 바닐라 익스트랙 1/2작은술
설탕 30g
솔잎 추출 시럽 1작은술
솔잎 설탕(솔잎을 말려 설탕과 함께 숙성시킨 것) 2작은술
토치(캐러멜라이징용)
홍시 준비
숙성된 홍시의 껍질을 벗기고 씨를 제거해 부드러운 과육만 남긴다.
체에 한 번 걸러 더욱 매끄러운 퓨레로 만든다.
크렘 앙글레즈 베이스 만들기
볼에 달걀 노른자, 설탕, 솔잎 시럽을 넣고 잘 섞는다.
냄비에 생크림과 우유, 바닐라빈을 넣고 중약불에 끓기 직전까지 데운 후, 계란 혼합물에 천천히 부어가며 섞는다.
베이스와 홍시 퓨레 섞기
완성된 크렘 앙글레즈에 홍시 퓨레를 넣고 고르게 섞는다.
체에 한 번 걸러 매끈하게 만든 뒤, 램킨(크렘브륄레 그릇)에 담는다.
굽기
160도 오븐에서 30~35분간 중탕 베이크한다.
흔들었을 때 가운데가 살짝 덜 익은 듯 흔들리면 꺼내서 식힌다.
식힌 뒤 냉장고에서 최소 3시간 이상 숙성.
토핑 & 마무리
차갑게 식힌 크렘브륄레 위에 솔잎 설탕을 고루 뿌린다.
토치로 겉면을 노릇하고 바삭하게 캐러멜라이징한다.
이 디저트는 ‘작은 위로’와 ‘조심스러운 기대’를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바삭한 겉면을 깨는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감정이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껴볼 것.
무기력은 게으름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는 의지가 없는 게 아니라 감정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일 수 있다.
무기력은 종종, 열심히 견디던 사람이 멈춰버릴 때 찾아온다.
그래서 다정하게 다뤄야 한다. 다그치지 말고, 왜 지쳤는지를 먼저 묻는 것부터 시작하자.
기대는 잘 자라는 감정이지만, 상처도 잘 입는다
기대는 누군가나 어떤 일에 '좋은 일이 생길 거야' 하고 마음을 미리 걸어두는 감정이다.
하지만 실망을 반복하면 그 기대는 껍질이 약해진다. '괜히 기대하지 말자'는 생각이 습관처럼 몸에 배기도 한다. 그러나 기대는 삶의 맛을 결정하는 설탕 같은 감정이다. 너무 자주 포기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이 필요하다
무기력한 시간을 '회복'이 아닌 '실패'로 해석하면, 감정은 더 깊이 침잠한다.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기보단, "지금은 그냥 쉬는 시간일지도 몰라"하고 숨을 고르는 쪽을 선택해보자. 가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회복의 한 방식이다.
무기력이 올라올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보세요.
"지금 내가 너무 지쳐 있는 건 아닐까?"
"내가 기대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게 흐려져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지금 내가 원래 하고 싶었던 건 뭐였더라?"
무기력은 마음의 엔진이 꺼졌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재시동을 걸기 전에, 잠시 눕는 것도 필요해요.
기대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작은 연습을 시작해 보세요.
1) 기대가 무너졌을 때, 바로 포기하지 말고 “그 일이 나에게 왜 소중했는지”를 다시 적어본다.
2) 매일 작은 기대 리스트를 적어본다.
→ [내일은 오늘보다 덜 피곤했으면.]
→ [이번 주말엔 좋아하는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크고 대단한 바람이 아니어도 괜찮다. 작은 기대도 마음을 살리는 연료가 될 수 있다.
*해당 소설은 밀리로드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와 밀어주기는 큰 응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