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돌봐주고 싶은 마음
오후 두시 반. 카페가 가장 붐비는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점심을 마친 뒤의 여유를 즐기러, 누군가는 일을 피해 잠시라도 숨을 돌리러, 또 어떤 이들은 눈에 띄는 표정 하나 없이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의자를 끄는 소리와 포스기 찍히는 소리, 커피 내리는 증기 소리와 서정과 설의 조용한 발소리가 뒤섞인 [온기]의 오후는 짧지만 진득했다.
서정은 손님들에게 전달할 오늘의 디저트 플레이트를 쥔 손에 긴장을 머금은 채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도 설의 특별한 레시피에 적힌 감정들을 완벽하게 읽어내진 못하지만, 표정과 몸짓, 말투, 망설임의 길이를 재보며 설의 옆에서 조심스럽게 감정의 모양을 유추해가고 있었다.
한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정한 정장 바지와 셔츠, 팔에 걸린 얇은 서류가방은 회사에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하지만, 어딘가 어설프기도 하고 앳되기도 한 모습이었다. 머리는 높게 질끈 묶여 있었고, 눈동자는 지친 기색으로 가득차 약간 멍해보였다. 입구에서 멈춰 선 그녀는 잠시 주위를 둘러본 뒤, 자리를 찾지 않고 카운터 쪽으로 곧장 다가왔다.
"…여기, 감정을 골라주는 디저트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숨을 내뱉듯 조심스럽게 말한 여자의 목소리에는, 미세하게 떨림이 섞여 있었다.
서정은 눈앞의 손님을 자세히 살폈다. 눈가에 자잘한 피로가 번져 있었고, 손목을 꽉 쥐는 버릇이 보였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말끝을 흐리는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준비해드릴게요."
서정은 설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하지만 설은 다른 주문을 정리하느라 바쁜 듯 보였다.
이상하게도 이번 손님의 분위기는 서정의 마음에 콕 박혀 떠나지 않았다.
처음 이곳에 와서 받았던 자신의 첫 디저트가 떠올랐다. 그때 자신도 이렇게 불안했고, 자기 안에 울렁이는 감정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몰라 서성였다.
서정은 조심스럽게 감정 서랍장 쪽으로 발을 옮겼다.
서랍장 앞에 섰지만 손잡이를 잡지 못한 채 한참을 망설였다.
'내가 이걸 열어도 되는 걸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설의 손이 닿지 않고도 완성되는 디저트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지, 스스로 만들어내고 싶었다.
서정은 '불안'이라고 쓰인 서랍을 찾아 조심스레 열었다.
안에는 연한 녹색의 연두콩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옆에는 라벤더 크림이 담긴 은색 병이 눈에 띄었다.
연두콩의 부드럽고 고소한 질감은 예민해진 속을 가라앉히는 데 좋고, 라벤더는 안정을 돕는 향이었다.
불안과 돌봄—두 감정은 느슨하지만 강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서정 씨."
설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들킨 것 같은 기분에 놀라 돌아보자, 설이 조용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서정은 잠시 숨을 삼키고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손님 디저트는… 제가 한 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설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묵인은 그렇게 해도 좋다는 신호이자 신뢰의 표현이었다. 서정은 고마웠다.
***
연두콩 푸딩이 천천히 굳어가고 있었다.
서정은 상단에 라벤더 크림을 부드럽게 얹으며 잠시 머뭇거렸다.
자신이 이 디저트를 온전히 책임지고 만들어낸 건 처음이었다. 작고 고운 숟가락을 곁들여 쟁반 위에 올리자, 설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저도 늘 정답을 알고 있는 건 아니에요."
서정은 그 말을 들으며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꼈다. 설의 목소리는 마치, 혼자 시도해봐도 괜찮다는 응원으로 느겨졌다. 누군가의 정해둔 답이 아닌, 자신의 감각을 믿어도 된다는 조용한 격려.
여자는 디저트를 앞에 두고 한참을 말이 없었다. 서정이 가만히 지켜보던 중, 여자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죠. 디저트를 받았는데…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그 말에 서정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은 시간이니까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한 숟갈 떠 입에 넣었다. 말랑한 연두콩 푸딩이 혀끝에 닿자, 그 위에 얹힌 라벤더 크림이 부드럽게 퍼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처음엔… 이걸 먹는다고 뭐가 나아질까 싶었거든요."
그녀는 서정에게 시선을 옮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근데 아무도 나한테 '괜찮다'고 말해준 적이 없었다는 생각이 나요. 아무것도 못하고, 그냥 있는 것도 괜찮다고…"
말끝을 흐린 그녀는 마치 허락받은 사람처럼 조용히 웃었다. 서정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불안할 때는… 누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숨이 쉬어지니까요."
그녀는 연두콩 푸딩을 조금 더 떠 입에 넣었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질감에 더해진 은은한 라벤더 향.
익숙하지 않은 조합인데도 이상하게, 어릴 적 자신이 끌어안고 있던 작은 인형 냄새처럼 느껴졌다.
***
그날 마감을 앞둔 저녁, 서정은 서랍장 앞에서 메모지를 꺼내 하나의 감정을 적었다.
그건 아직 누군가에게 명확히 말하지 못했지만 자신 안에 분명히 존재하는 감정이었다.
'나를 돌봐주고 싶은 마음'
감정 서랍장의 빈 서랍에 그 라벨을 붙이며, 서정은 문득 생각했다.
그날 그 여자는 '불안' 때문에 왔지만, 떠날 땐 '돌봄'을 가득 느끼고 떠날 수 있었다고. 그 변화가,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조용하지만 확실한 사건으로 일어났다는 게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카페 안에는 어느새 오후의 번잡함이 지나간 뒤의 고요가 찾아오고 있었다. 서정은 처음으로, 자신도 누군가에게 따뜻한 무언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을 가졌다.
온기의 디저트 레시피
들여다 볼 감정 : 불안, 돌봄
삶은 연두콩 150g (껍질 벗긴 것)
우유 200ml
생크림 100ml
판젤라틴 2장 (또는 가루 젤라틴 5g)
설탕 25g
바닐라빈 약간
라벤더 꽃잎 (드라이) 1작은술
꿀 1작은술
1. 연두콩 푸딩 만들기
삶은 연두콩을 곱게 갈아 체에 한 번 내려 부드럽게 만든다.
우유, 생크림, 설탕, 바닐라빈을 약불에 데운다.
젤라틴을 미리 불려두고, 데운 크림에 녹인다.
곱게 간 연두콩에 섞고, 푸딩 틀에 부어 냉장고에서 3~4시간 굳힌다.
2. 라벤더 크림 만들기
생크림 80ml에 드라이 라벤더를 넣고 약불에 데워 향을 우려낸다.
체에 걸러 식힌 후, 꿀을 섞고 휘핑해 크림 형태로 만든다.
3. 플레이팅
차가운 푸딩 위에 라벤더 크림을 부드럽게 얹고, 마른 라벤더 한 송이를 장식처럼 올린다.
얇은 유리 디저트컵에 담아 시각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색 조합 완성.
누군가 내게 숟가락으로 떠먹여주던 어린 시절의 기억처럼 푸딩의 질감은 심리적 안전감을 일으킨다.
'다시 안정을 느껴도 괜찮다'는 것을, 천천히 씹으며 되찾도록 유도한다.
불안은 항상 '나만 이러는 건 아닐까?'라는 감각을 동반한다.
사회 초년생, 새로운 관계, 낯선 환경 속에서 사람은 스스로를 끊임없이 비교하게 되고, 그 불일치에서 자신을 점점 축소시킨다. 하지만 그런 불안 속에서도 누군가의 '조용한 돌봄'은 온기를 남긴다. 그건 설명이나 해결이 아닌 곁에 머물러 주는 돌봄이다.
불안은 향기와 감각으로 눌러주는 것이 효과적이에요
라벤더는 긴장과 불안을 완화시키는 대표적인 허브로, 후각을 통해 자율신경계의 긴장을 풀어줍니다.
향기를 맡고 깊게 숨을 들이쉬는 것만으로도, 신체는 '지금은 괜찮다'고 반응하기 시작해요.
불안할 때는 자신에게 묻지 말고, 감각을 느껴보세요
'왜 이러지?'가 아닌, '지금 내 손은 따뜻한가?', '입안에 퍼지는 건 어떤 맛인가?'
등 감각 중심의 언어로 전환하는 것이 불안을 당장의 현실로 데려와 줍니다.
*해당 소설은 밀리로드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와 밀어주기는 큰 응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