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만들어 가는 용서라는 과정
카페 [온기]의 오후는 유난히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했다.
햇살은 유독 따듯했고, 잔잔한 음악 위로는 유리잔 부딪히는 소리마저 따뜻하게 번졌다. 서정은 자신이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앉았던 창가 자리의 유리창을 닦고 있었다. 창문 너머 하늘의 빛이 반사되어 얼굴 위로 흘렀다.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추고 무심코 자신을 비춰보았다. 고요하고 단정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며 감정을 꼼꼼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어딘가 껄끄럽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불편함이 있었다. 자신에게도 가슴 속 어디엔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걸려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온기]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돕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저...설 님."
서정은 카운터 쪽으로 몸을 돌리며 물었다.
"혹시, 종종 동시에 여러 감정이 겹쳐서 느껴지는 경우도 많은가요?"
설은 조용히 케이크 시트를 자르던 손을 멈췄다.
"있죠. 감정은 서로 연결돼 있거든요. 수치심은 억울함과 자주 닿아 있고, 용서는 가끔 억울함을 안은 채 시작되죠."
"그럼... 아직 용서가 안 됐는데, 괜찮은 척하는 것도 여러 감정이 섞여 있어서 자연스러운 건가요?"
설은 잠시 멈칫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서는 단번에 이뤄지지 않아요. 마치 따뜻한 온도에서 천천히 녹아드는 설탕처럼."
그때, 문이 열렸다.
긴 코트를 입은 중년의 여자가 들어왔다. 머리를 단정히 묶은 그녀의 표정은 어딘지 조심스러웠다. 작은 회색 가방을 양손으로 꼭 쥔 채, 카운터 앞에 다가온 그녀는 설에게 눈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여기가 감정을 위로해주는 디저트를 만든다고 해서…"
"맞습니다. 편히 앉으세요."
"저 그런데… 일단 제 이야기를 조금 털어놓고 싶어서요."
"아…. 네 우선 앉아서 천천히 이야기해 주셔도 좋아요."
서정이 자리를 안내했다.
여자는 좌석에 앉고도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의자에 등을 붙이지도 못한 채, 손가방 끈을 만지작거렸다. 마침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꽤 오래전 일이에요. 그런데 요즘, 그 기억이 자꾸 떠올라요. 자려고 누우면 그 장면만 반복돼요."
서정은 이야기를 집중해서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는 말끝마다 주변을 살피며, 누가 들을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막 회사에서 대리 직급을 달았을 무렵이었어요. 그 즈음 들어온 후배가 있었는데, 제가…그 아이를 일부러 무시했어요. 사소한 실수를 확대해 말을 전해 점점 더 팀에서 소외되게 했어요. 그 애는 결국 조용히 퇴사했죠."
"어떤 것 때문에 일부러 그러셨던 것 같으세요…?"
이야기를 듣던 서정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처음엔 그냥… 그 애가 나보다 말도 잘하고, 발표도 잘하는 게 싫었어요. 점점 질투가 미움으로 바뀌더라고요."
"그 후로는요?"
"그 이후로,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계속 회사에 다녔어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경력을 쌓아 이직도 했고… 그런데 요즘 그 친구가 떠올라요. 우연히 SNS에서 그 이름을 봤거든요. 어쩌면 그 사람은 저를 기억조차 안 할 수도 있겠지만…"
여자는 말을 멈추고 시선을 떨궜다. 눈시울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실은 그러고 나서 이제야 돌아보게 되었어요. 내가 주었던 상처가 사라지지 않았을까 봐 무서워요. 그 기억이 제 안에서 수치심으로 남아 있나봐요. 저…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서정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과거의 사소한 행동이 마음속 깊이 남겨진 흔적이 되어버린 그 감정이, 어딘지 모르게 낯설지 않았다.
서정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카운터 뒤 주방으로 향했다.
"우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곧 메뉴를 가져다 드릴게요."
주방에 들어서자 설은 이미 감정 서랍장을 열고 있었다.
'수치심'이라는 라벨이 붙은 서랍에서 그는 은은한 핑크빛 딸기 시럽과 부드러운 마스카포네 크림을 꺼냈다.
그 옆에 놓인 '용서' 서랍에는 바닐라 콩이 든 우유병과, 얇고 정갈한 슈 반죽이 들어 있었다.
설이 조용히 말했다.
"용서는 뭘 덮는 게 아니라, 천천히 만들어가는 거예요."
그는 마스카포네 크림을 채운 슈 반죽 위에, 딸기 크림을 리본처럼 얇게 저민 소스를 부드럽게 얹었다. 겉면엔 아주 소량의 슈가파우더가 내려앉았다.
"여기, 수치심을 부드럽게 감싸주는 맛까지 더합시다."
서정은 설의 디저트 만드는 과정을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자주 보아도 여전히 신기하고 그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 감사했다.
***
디저트가 테이블에 놓이자, 여자는 두 손으로 살짝 떨리는 숟가락을 들었다. 여자는 슈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난 뒤, 손에 든 스푼을 살며시 내려놓았다.
"지금 이 크림이 목을 타고 내려가는 그 느낌이… 내가 그 후배를 처음 질투했을 때와 비슷해요."
여자의 말에 서정은 눈을 떼지 않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처음엔 그 애가 너무 반짝여 보였어요. 저는 그걸 견딜 수 없었고요. 어쩌면 그 애를 미워한 게 아니라, 그런 모습을 좋아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근데 그게 너무 부끄러웠어요."
'부끄러웠다.'
서정은 그 말을 한번 더 곱씹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은 미숙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 생각하고 지워버렸던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은 자신의 수치를 또렷하게 기억하고, 다시 마주하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용기였다.
"저…"
서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는 사실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받은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무 말도 없이 떠났거든요. 당시에 전 그게 더 괴로웠어요. 이유를 알 수 없었으니까요."
여자가 서정을 바라보았다. 서정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까지 말없이 기다려주는 듯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그 기억을 붙잡고 있었어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왜 나를 그렇게 대했는지… 가끔은 그 사람이 다시 나타나서 사과해주길 바랐고, 또 가끔은 그냥 그 기억 자체가 사라지길 바라기도 했어요."
서정은 작게 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나도 언젠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더라고요. 내가 괜찮아지기 위해서요."
두 사람 사이에 잠깐 침묵이 흘렀다. 하지만 그 침묵은 더 이상 불편하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의 부끄러움과 후회가 조심스럽게 겹치며 이어지는 고요한 침묵같았다.
"이 디저트 말인데요."
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딸기 소스가 리본처럼 얹혀져 있는 게, 마치 그 기억을 포장해주는 것 같아요. 수치스러웠던 기억을 미화하라는 게 아니라, 이제는 다르게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아요. 고맙습니다. 오늘 이걸 먹었다는 사실이… 저를 다시 괜찮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줘요."
서정은 그 말에 마음이 사르르 녹는 기분이 들었다.
용서를 받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용서를 하는 것과도 닮아 있었다. 두 행동 모두 누군가 "이제 끝"이라고 선언해주지 않는 일이라는 점이. 스스로 내 마음을 천천히 정리해야만 하는 일이었고, 아주 조금씩 진행되는 움직이는 종류의 일이었다. 용서를 하고 안 하고는 한 번에 결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반대로 용서를 받고 수치심을 놓아주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여자가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 오늘에서야, 솔직하게 저의 과오를 인정하는 느낌이에요. 말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네요. 언젠가 더 용기가 생기면 직접 미안했다고 말하고 싶기도 해요. 이것도 제 욕심일 수 있지만…."
"언젠가, 그 후배도 그걸 알 수 있을 거예요. 지금 이 마음이 가짜가 아니라는 걸요."
서정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여자는 웃었다. 그 웃음은 처음 들어왔을 때의 그것과는 달랐다. 수줍지만 진심이 담긴,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여자가 떠난 뒤에도 서정은 한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한때 가까웠던 사람. 그 사람은 아무런 해명도 사과도 없이 떠났고, 서정은 그에 대해 분노하며 마음속으로 끝없이 그를 탓해 왔다.
'왜 그랬는지 말해주기만 했어도…'
'그 사람이 먼저 사과했으면 이렇게 오래 괴롭진 않았을 텐데…'
오랜 밤을 과거를 곱씹으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방금 전 손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그 사람도, 수치심을 품은 채 아직도 진정한 용서를 구하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정은 그 가능성 앞에서 자신이 처음으로 '용서를 하고 싶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모든 것이 정리되어서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은 그럴 수 있을 만큼 회복되었다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감정 서랍장 앞에 섰다. 설이 붙여놓은 새 라벨이 눈에 들어왔다.
[미움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아도 괜찮은 용서]
서정은 그 라벨을 천천히 읽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나도, 언젠가 그 사람을 용서하고 싶어."
그 말은 지금 당장 용서를 결정한 말이 아니었다.
다만 그날, 용서라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마음속에 올려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온기의 디저트 레시피
들여다 볼 감정: 수치심, 용서
재료
슈 반죽: 박력분, 버터, 달걀, 물, 소금
필링: 마스카포네 치즈, 생크림, 설탕, 바닐라빈
토핑: 딸기 리본 소스 (딸기퓨레, 설탕, 레몬즙, 리본 형태로 줄지은 딸기 슬라이스)
데코: 슈가파우더 약간, 민트잎 (선택)
만드는 법
슈 반죽을 만들어 적당한 크기로 짜서 200℃ 오븐에서 노릇하게 구워낸다.
마스카포네와 생크림을 섞어 부드러운 크림 필링을 만든다.
딸기를 얇게 슬라이스해 설탕, 레몬즙과 함께 졸여서 리본 형태의 소스를 만든다.
식힌 슈에 마스카포네 필링을 채워 넣고, 딸기 리본 소스를 얹는다.
마지막으로 슈가파우더와 민트잎을 올려 마무리.
마스카포네는 고소하고 부드럽지만 쉽게 무너지기도 하는 감정처럼 섬세한 마음을 상징한다.
딸기 리본 소스는 상처를 덮는 포장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 안에 진심을 담는다면 회복의 은유가 된다.
이 디저트처럼 겉으로는 가볍고 사랑스러워 보여도, 속은 진심으로 채워야 비로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치심이란 감정도 진심을 마주할 때 비로소 용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수치심이 올라올 때 감정의 원인을 인식해 보세요
수치심은 주로 "내가 잘못됐어"라는 자기 부정에서 시작됩니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 그 상황의 문제는 '내가 나쁘다'가 아니라, '그때 미처 몰랐던 나'에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첫 걸음입니다.
용서를 향해 나아가고 싶다면 용서는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닌,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이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할 때 가장 힘든 사람은 스스로입니다.
용서를 감정의 절차로 이해해 보세요
한 번에 되는 게 아니라, 기억할 때마다 조금씩 반응이 누그러지는 반복 과정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작은 행동으로 시작해 보세요
상대를 직접 용서하지 않더라도, 관련된 물건을 정리하거나, 감정을 글로 써내려가는 방식도 유효합니다.
*해당 소설은 밀리로드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와 밀어주기는 큰 응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