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페퍼를 뿌린 유자 머랭 타르트

외로움을 감춘 허세의 껍질

by 다희

정오 무렵의 [온기]는 하루 중 가장 활기찬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연일 이어지는 푹푹찌는 무더운 날씨에 에어컨이 풀가동 중이었지만, 바쁜 주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후끈했다. 주문이 연이어 들어오고, 설의 손은 어느 때보다 빠르게 움직이는 중이었다. 서정도 말없이 흐름에 따라 움직였다. 설거지를 끝낸 그릇이 말라가는 틈마다 테이블을 닦고, 손님 한명 한명과 감정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도 그녀는 문득문득 손님들의 표정에 마음이 덜컥 걸렸다. 대화 몇 마디에도 어떤 감정은 또렷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오늘은 유독 누군가의 감정이 잘 전이되는 그런 날이었다. 그늘이 얼굴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이 자주 들어왔고, 그 표정들이 전부 서정의 가슴속에 남아 흔들리고 있었다.


***

그러던 그때, 문이 조용히 열렸다.


이번 손님은 또렷한 이목구비에 다소 과한 느낌이 드는 검정 뿔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셔츠 소매를 바짝 걷어붙이고 시계와 팔찌를 하나씩 착용한 양손이 빛났다. 겉보기엔 세련되게 꾸민 사람처럼 보였지만, 동시에 어딘가 지나치게 정돈된 인상이었다. 무언가 어색한 '완벽함'의 냄새랄까.


"여기, 감정을 디저트로 위로해준다는 카페 맞죠?"

그는 웃으며 자리에 앉았지만, 웃음 끝은 뭔가 이상하게 부자연스러웠다. 카페 내부를 여러번 스마트폰으로 찍고 바로 SNS에 게시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설은 그의 시선을 조용히 따라가다 말없이 감정 서랍장으로 향했다. 남자의 감정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설도 마찬가지였는지, 천천히 '외로움'이라고 적힌 서랍을 꺼내 들고, 유자청이 들어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이어서 '허세'라고 적힌 작은 라벨이 붙은 병을 꺼냈는데, 그 안엔 잘게 부순 검은 후추 결정이 담겨 있었다.


"유자는 외로운 감정과 잘 어울리는 재료에요." 설이 말했다.

"그럼 후추는요?" 서정이 물었다.

"허세는 자극적인 방식으로 외로움을 감추려는 감정이죠. 입 안에 살짝 톡 쏘는 자극이 있어야 본심이 드러나요."


조용한 음악이 흐르고, 설은 유자 필링 위에 하얀 머랭을 올린 뒤, 정성스레 블로우 토치를 꺼내들었다. 겉면이 노릇하게 구워지자, 마지막으로 갈아놓은 블랙 페퍼를 머랭 위에 솔솔 뿌렸다. 그릇이 조용히 테이블 위에 놓였다.


남자는 환히 웃으며 디저트를 받아 들고 여러 각도로 사진을 찍는 것에 열중했다. 찰칵, 찰칵. 스마트폰 카메라 셔터음이 연신 터졌다. 서정은 그의 촬영이 끝날 때까지 묵묵히 옆에서 기다려주었다.


촬영을 마친 남자는 서정에게도 기다려주어 고맙다는듯 눈웃음을 전했다. 그후 디저트의 머랭 부분만을 아주 조심스레 한 스푼 떠 입에 가져갔다.


"오...이런 맛..." 남자는 눈까지 감고 곰곰이 맛을 느끼는듯 행동했지만 서정은 눈치챘다.

그가 진짜 디저트를 맛보고 있는 게 아니라, 그런 척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어떤 감정이 느껴지세요?" 침착하게 서정이 물었다.


"어... 그게..."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며 말끝을 흐렸다.

"글쎄요 감정은 잘 모르겠는데...제가 요즘 좀 바빠서요. 요즘은 감정 같은 건 딱히 신경 안 쓰고 사는 게 낫지 않나요?"


그 말은 단호하고 강하게 전해졌지만, 서정은 금세 알아차렸다. 그건 감정을 애써 숨기는 사람의 패턴이었다.


손님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서정은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 저도 알지만, 그래도 다시 찬찬히 음미해 보시고 말씀해주시면 좋겠어요."


남자는 이 말에 힘껏 올리고 있던 입꼬리를 천천히 내리고,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저, 사실은... 오늘 생일이에요."


"정말요?"


"네, 근데 아침에 엄마한테 받은 카톡 말곤 아무도 모르더라고요. 친구들 단톡방에 티는 안 냈고요. 괜히 초라해 보일까 봐. 그래서, 그냥 누가 모르는 사람이라도 나한테 말 걸어주면 좋겠다 싶어서 여기 왔어요."

남자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말을 이어갔지만, 말끝마다 묻어나는 그늘은 숨길 수 없었다.


"회사에서도 늘 잘 지내는 척 해요. 어쩌다 혼자 밥 먹으면 더 바빠서 그런 척 하고요. 진짜 외로운 티는 안 내는 게 습관이 됐네요."


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가끔 그랬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너무 많이 해버려서 가끔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줄 착각해버리기도 했던 시간들.


남자는 디저트를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한 스푼을 떴다. 이번엔 머랭부터 바삭한 타르트지까지 모두.


유자의 상큼함과 머랭의 부드러움, 그리고 혀끝을 간지럽히는 후추의 자극이 동시에 퍼졌다. 눈을 감은 그의 얼굴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입술이 조금 떨렸고, 눈가가 붉어졌다.


"기분 이상하네요.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들한테, 생일을 축하받는 것도 아닌데... 그냥, 이해 받는 느낌이 들어서."


"나의 감정에 대해 누군가 끝까지 물어 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때가 있죠." 설이 조용히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저도 가끔은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사실 나도 좀 외롭다고. 근데 그 말 꺼내면 내가 진짜 외로운 사람이 될까봐... 겁이 나요."


"그런 말을 안전하게 꺼낼 수 있는 장소가 되면 좋겠어요, 여기가."

서정이 작게 말했다.


남자는 남은 디저트를 천천히 입에 넣으며 말했다.

"오늘 여기 와서, 제일 좋은 생일 선물 받은 것 같아요."

그 말에 서정도 웃으며 답했다.


"축하드려요. 오늘 오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손님이 떠난 후, 설은 조용히 감정 서랍장에 라벨 하나를 붙였다.


'외로움을 숨기기 위해 내세우는 반짝이는 말들'

가게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오후의 해가 기울고, 불그스름한 햇살이 타르트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순간, 서정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자기 자신도 지금까지 말하지 않은 감정에 대해 너무 오래 침묵해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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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의 디저트 레시피

블랙 페퍼를 뿌린 유자 머랭 타르트

들여다 볼 감정 : 허세, 외로움

레시피

재료

타르트지: 버터, 밀가루, 설탕, 달걀노른자

유자 필링: 유자청, 달걀노른자, 설탕, 옥수수전분, 무염버터

머랭 토핑: 달걀흰자, 설탕, 약간의 바닐라 익스트랙

가니시: 블랙 페퍼 분말 (굵게 갈은 것)


만드는 법

타르트지를 반죽해 틀에 넣고, 공기구멍을 낸 후 180도 오븐에서 10~12분간 구워 식혀둔다.

유자 필링은 유자청과 달걀노른자, 설탕, 전분을 약불에서 천천히 섞어 끓이다 버터를 넣고 걸쭉해질 때까지 졸인다.

식힌 타르트지에 유자 필링을 부어 냉장 보관해 굳힌다.

머랭은 단단한 뿔이 생기도록 휘핑 후, 타르트 위에 동그랗게 얹는다.

블로우 토치로 머랭을 노릇하게 구운 뒤, 블랙 페퍼를 솔솔 뿌려 마무리한다.


서정의 테이스팅 노트

외로움을 감춘 허세의 껍질을 깨어야 진짜 감정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기억해야 할 포인트

외로움은 종종 아무도 내 진짜 마음을 모르고 있다고 느껴질 때 시작됩니다.

그러나 타인에게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내가, 먼저 스스로를 외롭게 만들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세는 '나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증명하고 싶을 때 생깁니다.

그 감정 아래엔 늘 ‘사실은 괜찮지 않음’이 자리 잡고 있죠. 그걸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허세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살고자 하는 몸짓’이 됩니다.


감정 해소 팁

허세 뒤에 숨은 감정을 탐색해 보세요.

“내가 왜 저렇게 말했을까?” 허세는 ‘불안, 두려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변형된 표현입니다. 그 진짜 감정을 붙잡는 것이 첫걸음입니다.


자존감 채우기 vs 자존심 채우기 구분해 보세요.

허세는 ‘자존심’의 반응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존감은 조용히 나를 신뢰할 때 자라납니다. 작은 성취나 감정 인정으로 자존감을 천천히 채워보세요.


감정을 은폐하지 말고, 의식적으로 인정해 보세요.

“나는 외롭다”고 말하는 건 약한 게 아니라, 내 감정을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일기를 쓰거나 혼잣말로 감정을 말로 표현해보세요. 감정을 ‘객체화’하면 통제감이 생깁니다.








*해당 소설은 밀리로드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와 밀어주기는 큰 응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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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