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와 투사의 상관관계
"오늘은 자몽을 쓰자."
해도 뜨기 전 이른 새벽, 카페에 도착한 설이 작게 내뱉었다. 여전히 창문엔 이슬이 맺혀 있었고, 불이 켜진 카페 안은 바깥보다 온도가 조금 높았다. 그는 먼저 바깥 유리창을 한 번 훑어보고 창을 활짝 열어 텁텁한 공기를 환기시켰다. 창문 아래 쪼르르 놓여 있는 화분 정리까지 마친 그는 천천히 걸어 카운터로 향했다. 이내 카운터 위 작은 서랍을 열어 무광 블랙 노트를 꺼내어 펜으로 그날의 키워드를 적기 시작했다.
감정 온도: 17도
감정 키워드: 질투, 투사
그는 '17도'라는 숫자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 차가우면서도 오래 서 있으면 곧 덜덜 떨릴 것 같은 온도가 바로 17도이다. 뺨에 바람이 닿으면 움찔할 정도의 서늘한 느낌까지 주는 온도. 불편하게 자꾸만 눈치를 보게 되고, 타인의 말투가 뾰족하게 들리는 감정의 온도였다.
그에게는 가게에 들어오는 손님의 감정을 찬찬히 읽고 느낄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손님이 오고 나서야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 디저트를 준비할 수는 없는 노릇. 부지런하게 오픈 준비를 해야만 손님에게 딱 알맞은 농도와 맛의 위로를 할 수 있다.
설의 방법은 이렇다. 날카롭고 섬세한 감각을 총동원하여 그 날 가장 두드러질 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감정 온도를 미리 예측해 둔다. 그리고 그 기운에 맞춰 재료를 꺼낸다. 완성된 디저트가 아닌, '준비된 상태'의 디저트를 프렙해두는 것. 오늘은 자몽 바바루아에 은은한 타임잼을 약간 곁들일 생각이었다.
이 디저트 메뉴는 방문하는 손님의 감정에 따라 아주 조금씩 변형되는데 그 변형은 생각보다 큰 폭으로 여운을 남기게 된다. 감정이라는 건 그랬다. 아주 작은 파동으로도 커다란 물결이 되기도 했다.
설이 키친에 들어간 후, 문이 조용히 열렸다. 서정이었다.
***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일 도와드려도 될까요?"
전날보다 차분한 얼굴의 서정의 눈가는 살짝 부어 있었다. 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앞치마를 내밀었다.
"오늘은 디저트용 자몽크림 만드는 법부터 배워요."
서정은 예상보다 빠른 진도에 조금 놀랐지만 금세 마음을 다잡았다. 작업대엔 이미 아몬드 가루, 바삭하게 구워진 크럼블, 탕탕 두드려 손질해둔 아몬드, 그리고 젤라틴과 자몽 껍질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떠오르게 하는 오늘의 디저트가 이토록 구체적으로 재료로 준비되어 있었다.
둘 사이엔 지나친 친근함은 없었지만, 어색한 공기가 흐르지 않았지도 않았다. 설은 서정에게 투명한 유리병 하나를 내밀었다. 안엔 말린 오렌지 껍질과 정향, 바닐라 빈 끝 조각이 들어 있었다.
"이건요?"
"감정별 시럽에 쓰는 재료예요. 직접 건조하고 혼합해요. 일단 감정을 맛으로 익히는 연습부터 해보죠."
설은 감정 노트를 꺼냈다. 노트는 무광 검은 가죽 커버에 얇은 종이로 묶여 있었고, 감정 키워드마다 짧은 설명과 디저트 예시, 그에 맞는 재료들이 손글씨로 적혀 있었다.
"여기요. 오늘 아침에 내가 골라 놓은 키워드예요."
서정은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감정: 질투]
혀끝에서 톡 쏘는 자극, 안쪽으로 끈적하게 번지는 감각이 자몽과 닮았다.
'투사'와 동반될 경우, 감정의 주인이 불분명해지는 경향이 있다.
"질투는 왜 자몽이에요?" 서정이 물었다.
"쓴맛이 분명한데, 달콤하게 포장돼 있잖아요. 겉으론 밝고 상큼해 보이는데, 안은 꽤나 복잡하다는 점까지 닮았죠."
그 말에 서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
어느덧 오전 11시, 종소리와 함께 손님 한 명이 들어왔다. 검은 트렌치코트를 입은 여자 손님이었다.
"오늘의 디저트 부탁해요."
여자의 목소리는 또렷했지만 음색은 피로했다.
설은 고개를 끄덕였고, 서정은 물컵을 내어주러 다가갔다. 여자는 창밖을 바라보며 앉았다. 짐을 내려놓지 않은 채, 손에 든 핸드폰을 껐다 켰다 반복했다.
"어떻게 준비하면 될까요?" 서정이 작게 물었다.
설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서정에게 자몽을 손질하라는 손짓을 했다.
서정이 껍질을 벗긴 자몽을 받아 설은 능숙한 칼질로 얇게 썰었다. 미리 준비되어 있던 크림 그릇에 자몽을 얹은 후, 그 위에 타임잼을 작은 스푼으로 흘려 넣는 과정은 섬세하지만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온기]의 디저트는 손님에 따라 디테일한 재료들의 양이 달라진다는 것이 포인트였다. 그건 아직 설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잠시 후, 서정은 완성된 디저트를 손님에게 조심스레 내었다.
여자는 옆에 놓인 스푼으로 디저트를 한 스푼 떴다. 자몽의 투명한 조각 아래로 묵직한 크림이 함께 떠졌고, 잼은 손톱보다 작은 타임 잎과 함께 퍼졌다. 그녀는 말없이 입을 움직이며 이내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이상하죠. 내가 고른 메뉴도 아닌데, 어떻게 딱 내 감정을 건들이는 맛이 나는지."
여자가 작게 말했다.
"혹시… 오늘 많이 힘드셨나요?"서정이 조심스럽게 묻자,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어제 잠시 만났던 제 친구에게 연애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자꾸 제 연애를 흉보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요. 진짜 헤어지는 게 나을지 불안하기도 하고. 근데 방금 인스타그램을 보니까 얜 재밌게 데이트 중이네요."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어 당황하는 서정을 보고 카운터에서 설이 나오며 대답했다.
"질투는 누구나 해요. 투사만 안 하면 돼요."
"투사요?"
"실은 자기 감정인데, 꼭 남 탓인 것처럼 느끼는 거요. 그건 오래가고 버리기도 어려워요."
여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마지막 자몽 조각을 숟가락으로 떠 입에 넣었다.
"묘하게 개운하네요. 입은 쓴데, 속은 좀 시원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럴 거예요. 쓴맛은 억지로 삼키면 오래 남는데, 이렇게 천천히 씹으면 조금은 다르게 느껴지니까요."
여자의 표정은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지만, 여전히 눈동자 어딘가에 맺힌 말들이 남아 있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고 서로 웃으면서 말하지만, 정작 어떨땐 그 친구가 연애 때문에 저보다 힘들어하면 괜히 이상하게 안심이 될 때도 있어요. 저 진짜 웃기고 찌질하죠?"
말을 내뱉고 얼굴이 조금 붉어진 여자의 곁에 서정과 설이 그대로 서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면…사실 그 친구가 저보다 먼저 결혼할까 봐 조마조마했던 것 같아요. 제가 먼저 연애를 시작해도… 괜히 그 친구가 더 안정적인 사람 만나면, 불안하고 초조해졌고요. 그런 것까지 경쟁할 필요 없는데, 저 너무 꼬여있고 못난 사람 같네요."
그 말을 듣던 서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마음… 저도 이해가 돼요. 나보다 누군가가 더 나아 보일 때, 마치 내 자리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잖아요."
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이어 말했다.
"그런 질투는 애초에 비교가 없으면 생기지 않아요. 그런데 우리는 늘 비교 속에서 자라왔죠. 그 비교하게 되는 습관은 자꾸 타인을 통해 내 감정을 비춰보게 만들어요. 그게 투사예요. 친구의 연애를 신경 쓰는 건 오히려 손님 쪽인데 처음에는 마치 친구가 그런다고 생각하는 것."
"아..."
여자는 작게 중얼였다.
"내가 돌봐주어야 할 감정인데… 자꾸 남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군요."
"네. 질투는 원래 내 안에 있는 감정이에요. 그걸 솔직하게 들여다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문제는, 자꾸 그 감정을 감추거나 남 탓으로 돌릴 때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여자는 테이블 위에 비워진 접시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감정을 이렇게 맛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말보다 명확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감정도 맛도, 정직할수록 오래 남으니까요."
설은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카운터로 돌아갔다.
창밖에선 햇살이 점점 기울고 있었다. 붉은빛이 유리창에 닿아 반사되며 자몽껍질처럼 따뜻한 빛을 테이블 위에 드리웠다. 서정은 그 빛 사이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은 후련해진 사람처럼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그 순간 서정은 문득 알아차렸다.
우리가 부끄러워하는 감정일수록, 사실은 가장 우리다운 마음일지도 모른다고.
온기의 디저트 레시피
들여다 볼 감정 : 질투, 투사
자몽 1개 (선홍빛 과육 위주)
생크림 200ml
바닐라빈 또는 바닐라 익스트랙
설탕 2스푼
젤라틴 1장
아몬드 크럼블 (기성 혹은 직접 구운 것)
타임잼 1작은술
자몽 껍질 약간 (슬라이스 후 설탕에 졸인 상태)
젤라틴은 찬물에 불려두고, 생크림과 설탕, 바닐라빈을 중약불에서 가열해 녹인다.
불을 끄고 불린 젤라틴을 넣은 뒤 잘 저어준다.
체에 한 번 걸러 부드러운 크림을 만든 후, 컵에 부어 냉장고에서 4시간 이상 굳힌다.
굳은 크림 위에 잘게 썬 자몽과 아몬드 크럼블을 얹고,
마지막에 타임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선택적으로 자몽 껍질 설탕절임을 얹어 마무리한다.
자몽의 쌉싸름한 감정은 바닐라 크림으로 중화되며,
타임잼의 묘한 향은 질투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입 안에서는 복잡하지만 삼키고 나면 개운함이 남는다.
질투는 나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비교에서 생기는 본능적인 감정이지만,
그것을 외면하거나 억지로 덮으면 오히려 왜곡된다.
투사는 감정의 방향을 잘못 튼 상태다
내 안의 감정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릴 때,
감정은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얽히게 된다.
자몽의 맛처럼 감정도 ‘그대로’ 느껴야 풀린다
씁쓸함을 감싸는 부드러운 크림처럼,
감정에도 나를 감싸주는 이해가 필요하다.
질투가 올라올 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세요.
"내가 지금 부러워하는 건 정확히 무엇이지?"
"이 감정은 내가 갖지 못한 것 때문인가, 혹은 잃을까 봐 불안한 것인가?"
투사를 멈추기 위한 연습을 시작해 보세요.
감정이 올라올 때 바로 누군가를 탓하지 않고,
‘이건 내 안에서 처리해야 할 나의 감정일지도 몰라’ 하고 한 걸음 물러서 보세요.
감정을 기록해 보세요.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고, 내가 왜 그 반응을 했는지 스스로 풀어보는 글을 쓰는 것도 좋습니다.
*해당 소설은 밀리로드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와 밀어주기는 큰 응원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