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탕 절임 토마토와 바질

묵혀둔 서운함과 말하지 못했던 진실

by 다희

오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하루종일 지치지도 않고 내내 내렸다. 무거운 공기 가득한 하늘은 뿌연 잿빛이었고, 골목길은 작은 간판들 마저 습기를 머금고 축 처져 보였다. 서정은 우산을 접으며 한 카페의 문 앞에 섰다.


카페의 이름은 '온기'였다. 이름이 아주 작게 적힌 간판은 글씨 위 금박이 조금 벗겨져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게 했다. 창문 너머 카페 내부는 수증기와 빗물에 절반쯤 가려져 있었다. 무채색 골목 안에서 유일하게 미지근한 조명의 불빛이 새어 나오던 그곳은, 지도 앱에 검색으로 나오지 않는 곳이었다.


집으로 곧장 들어가긴 아쉬웠던 서정이 평소 가던 길과 조금 다른 골목길을 걷다가, 우연히 시선이 머문 곳이었다. 어떤 공간을 가기 전 지도 검색으로 후기를 한 두개라도 찾아 보는 편인 서정은 그날도 습관처럼 지도 검색을 해보았으나 매장 정보가 뜨지 않았다. 평소 같았으면 선뜻 하지 않았을 일이었으나 그날은 그냥 그 곳에 가보기로 했다.


문을 열자, 한기와 따뜻함이 동시에 얼굴을 감쌌다. 바깥의 물기와 안쪽 공기의 온도가 묘하게 어긋나면서 순간적으로 기억 속 냄새 같은 게 피어났다. 말린 감귤, 우디한 향초, 오븐에서 막 꺼낸 디저트의 달콤한 냄새. 서정은 무심한 듯한 걸음으로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작고 조용한 곳이었다. 테이블은 여섯 개뿐. 의자는 제각기 생김새가 달랐고, 벽에는 투박한 나무 선반이 길게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유리병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각각 다른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슬픔 3일치], [질투 30분], [그리움 아주 오래된 것] 같은 이름.


사장님 컨셉 한번 지독하시네.


서정은 속으로 생각하며 일단 창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마다 있는 메뉴판엔 어쩐일인지 아무런 설명 없이 [오늘의 디저트]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주문하시겠어요?"

조용하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서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회색 앞치마를 두른 남자, 단정한 셔츠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오늘의 디저트로 주세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메뉴는 하나 뿐 아닌가. 서정은 카페에 대한 궁금함이 생겼지만 이내 귀찮아졌다. 그냥 무언가가 나오면 받아들이겠다는 마음. 사실 요즘 너무 지쳤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조용히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얼마 후, 테이블에 놓인 것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작은 유리 그릇. 투명한 유리 그릇 안에는 붉은 방울토마토들이 반짝였다. 얇게 껍질이 벗겨진 방울토마토들이 투명한 유리 접시 위에 단정히 올려져 있었고, 그 위엔 소금이 조금 뿌려진 채 바질잎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그릇 가장자리에는 작은 포크가 놓여 있었다. 서정은 포크를 집어 토마토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달다. 그런데 새콤하다. 딱 기분 나쁘지 않을 정도로 시큼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질의 향긋함까지. 혀끝에서 목 뒤로 감정이 한 겹 한 겹 넘어가는 느낌.


그리고 그 맛은, 이상하게도 오래된 기억을 불러냈다.



***

고등학교 2학년 여름. 한 친구가 도시락 반찬으로 '토마토 설탕 절임'을 가져온 무더웠던 날이었다. 짓궃은 친구들은 다들 할머니 취향 간식 이나며 웃었지만, 막상 먹어본 후 묘한 중독이 생겼고, 그 친구는 매번 꽤 많은 양을 준비해와 서정에게도 건넸다. 이름이… 은지였던가.


그 아이는 어쩐지 슬픈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다 한 학년을 마치기 전, 갑자기 은지는 전학을 갔었다. 전학을 가던 날, 은지는 서정에게 작게 접은 쪽지를 건넸다.


[늘 밝게 웃는 네가 나는 정말 부러웠어. 나는 그러지 못하거든.]


그날 서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사실은, 나 늘 밝게 웃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다른 감정을 말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야. 너한테는 조금 더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어떻게 이런 맛을…"

작게 중얼인 서정은 고개를 들어 카운터 쪽을 바라봤다. 남자는 카운터 너머에서 조용히 잔을 닦고 있었다.


"저기요. 이 오늘의 디저트는…어떻게 고르시는 거에요?"

"손님의 감정을 보고 고르죠."


남자의 말은 너무 간결했다.

"…감정이라고요?"

"손님마다 들어올 때 감정이 다 달라요. 눈빛이나 기척 같은 거요. 특히 오래된 감정은 식은 채로 남아 있어서 생각보다 보기 쉬워요."

"…그럼, 제 감정이 이런 맛이에요?"


그는 잠시 서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묵혀놓은 감정은 복합적이에요. 달아야 하고, 시큼해야 하고, 아주 바질 시럽처럼 약간 씁쓸한 향도 있어야죠. 그래야 부드럽게 풀려요."


서정은 그 말을 곱씹었다. 창밖의 빗소리는 조금 더 커졌고, 카페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그제야 서정은 카페에 들어오면서 무심코 지나친 나무 선반 위 감정 유리병들에 다시 눈길이 간다. [밀봉된 감정]이라 적힌 선반 위, 유리병들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무언가 이상한 공간. 그런데 그 낯섦이, 어째서인지 위로처럼 느껴졌다. 서정은 포크로 마지막 토마토를 집었다. 작고 매끈한 조각이 혀끝에 닿았다.


'나는 내 감정이 이런 맛이란 걸, 왜 여태 몰랐을까.'

서정은 잊었다고 생각했던, 전학을 간 친구 은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은지가 떠난 것이 너무 서운해서 사실은 그 후 연락이 올 때면 괜히 차갑게 굴었던 서정이었다. 그런 쪽지를 준 것을 보고도 은지가 미웠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한테 왜 그런 말을 남기고 갔는지.


쪽지를 준 은지와는 갑자기 어색해졌다. 이야기도 더이상 하지 않았고, 어디로 이사를 가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냥 그렇게 오해한 채로 멀어지는 걸 택하는 게 서정의 방식이었다. 궁금했지만 동시에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차피 멀어질 거니까, 그럼 더 속상하고 힘들테니까.


'나는 왜 늘 이렇게 묵혀 두는 걸까. 솔직하고 싶었는데, 나도 은지랑 더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그 순간, 서정의 마음 속 오래된 감정이 안쪽에서부터 조금은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치지 않는 비처럼, 풀리지 않던 감정도… 어쩌면, 이렇게 하나씩.







온기의 디저트 레시피

설탕 절임 토마토와 바질

들여다 볼 감정 : 묵혀둔 서운함, 풀리지 않은 오해, 말하지 못한 진심


재료

방울토마토 10개

설탕 2큰술

레몬즙 약간

바질잎 3~4장

소금 아주 살짝

물 2큰술


만드는 법

방울토마토는 껍질이 벗겨질 정도로 살짝 데친 뒤 찬물에 헹궈 식힌다.

그릇에 토마토를 담고 설탕과 레몬즙, 소금을 넣어 고루 섞는다.

냉장고에서 3시간 이상 재운다.

바질잎은 잘게 찢어 시럽에 섞어 마무리한다.


기억해야 할 포인트

묵혀 놓은 감정처럼, 이 디저트도 빠르게는 맛이 나지 않아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절이면 처음엔 낯설었던 조합이
나중엔 속 깊은 감정을 떠올리게 하죠.


감정 해소 팁

오래 묵은 감정은 갑자기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들여다보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때의 내가 느꼈던 감정에 “맞아, 나도 서운했어.”라고 말해 주세요.

그때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아니라, 그때의 나를 위로하는 것이 먼저예요.

마음이 편한 날, ‘그때 하고 싶었던 말’을 혼잣말처럼 적어보는 것도 좋아요.

꼭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않아도 괜찮아요. 스스로 풀어낼 실마리를 찾는 게 먼저예요. 감정은 얼려두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녹여내는 것이니까요.





*해당 소설은 밀리로드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와 밀어주기는 큰 응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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