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리가 올라간 커스터드 푸딩

회피와 자기혐오를 마주하는 연습

by 다희

비는 그쳤지만, 골목길의 공기는 여전히 눅눅했다. 서정은 검은 가죽 토트백을 팔에 걸고 천천히 [온기]의 입구에 섰다. 기분탓인지 간판의 금박 글씨는 어제보다 더 흐릿해 보였다. 문을 밀자, 카페 내부엔 구운 크럼블 냄새가 가득하고 낮은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또 오셨네요."


여전히 회색 앞치마를 두른 남자. 셔츠 주머니에는 [점장 | 설]이라고 쓰인 명찰이 반짝였다.

말끔한 셔츠, 절제된 머리 스타일. 검은 머리는 가볍게 넘겨져 있었고, 얼굴에는 여전히 감정을 짐작하기 어려운 무표정이 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어제보다 덜 낯설었다. 정적인 분위기이지만 집중되는 눈매였다.


카운터 너머 설이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무심한 척 했지만, 목소리는 어제보다 힘이 있었다.


"프리랜서라… 집에 있으면 일에 집중이 잘 안 돼서요. 조용한 공간을 찾다가 생각났어요."


서정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실은 집을 나서기 전까지도 망설였다.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도 디저트가 남긴 맛과 감정이 자꾸만 머릿속에 떠올랐다. 은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자각. 그건 서정 스스로에게 자꾸 질문을 하는 것 같았다.


'너 그때 은지가 정말 미웠던 게 맞아?'

인정하기 싫었지만 자신이 끝까지 바라보고 솔직해야 했던 순간, 부끄럽게 도망쳤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건 오늘 아침이었다. 이상했다. 기억을 천천히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조금은 소화되는 기분이었다.


"오늘의 디저트로 드릴게요."

설이 다시 말했다. 서정은 순간 멈칫했다.


"…어제랑 같은 사람인데, 오늘도 제 감정을 반영한 다른 디저트가 나와요?"

설은 유리잔을 닦던 손을 멈추고 서정을 바라봤다.


"감정은 고여 있는 듯 보여도 계속 움직여요. 어제 꺼낸 감정이 있다면, 그 아래 남아 있던 게 오늘 떠오르기도 하죠."

서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창가 자리에 앉았다. 아직 손님은 없었다. 서정은 천천히 주위를 훑었다.


벽면에는 여전히 유리병들이 놓여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눈이 더 머물렀다. [그리움 아주 오래된 것], [기억되지 않은 이별], [없던 척한 감정들]… 섬세하게 붙여진 라벨들. 꼭 오래된 수제 잼병처럼 정성스럽게 감정을 밀봉해둔 느낌이었다. 어제만해도 저건 그냥 이 카페의 컨셉 중 하나라고 생각했었던 서정이었다.


잠시 후 나온 오늘의 디저트는 커스터드 푸딩이었다. 납작한 흰 접시 위에 노란 푸딩이 얹혀 있었고, 그 위엔 설탕을 조려 윤기 나는 체리 콤포트가 소복이 올려져 있었다. 옆에는 은색 스푼이 조용히 놓여 있었다.


한 숟갈을 떠 입에 넣자, 크림의 부드러움과 체리의 짙은 단맛, 약간의 산미가 느껴졌다. 뭉근하게 끓여낸 체리 콤포트의 단맛. 이어지는 부드럽지만 묵직한 푸딩의 질감은 서정의 목을 부드럽게 감싸는듯 했다. 그리고 그건 무언가를 보내지 못하고 머물러 있는 감정의 맛이었다.


"…이건 어떤 감정을 보고 만드신 거에요?"

서정의 질문에 설은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잃어버린 걸 너무 오래 붙잡고 있을 때. 손에서 놓치지 못한 기억들이 고여 있는 상태죠. 그건 시간이 지나도 쉽게 흐르지 않거든요."

서정은 체리 하나를 포크로 눌러 보았다. 체리의 과즙이 터져 나왔다.


"푸딩을 제대로 맛보려면 스푼으로 꼭 위에서부터 잘 떠야 해요. 겉은 단단하지만 속은 부드럽고, 바닥에도 남은 진심이 있으니까요."

"어제랑 또 다른 맛의 감정이 보이셨나봐요. 신기해요. 사람 감정이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보일 수 있다니."

설은 대답하지 않고, 투명한 병 하나를 나무선반 위에서 꺼내 보였다. 병 라벨엔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기혐오와 회피, 약 10년 전부터]

서정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제 거예요?"

"어제 입구에 들어설 때 보였어요. 다 꺼내진 건 아닌데, 오늘은 조금 더 깊이 꺼낼 수 있겠다 싶었죠."

"…혹시, 그런 감정들을 병에 담는 게… 사장님의 방식인가요?"


설은 처음으로 짧게 웃었다.

"여기선 이름이 아니라 감정으로 손님을 기억해요."

그 순간, 서정은 낯설지만 싫지 않은 연결감을 느꼈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이 공간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서정은 자기도 모르게 이 말을 꺼내고는 놀라버렸다.


"여기는 사람을 참 이상하게 편하게 만들어요. 저, 혹시… 여기서 일해도 되나요?"

그 말은 서정 자신도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튀어나왔다. 설은 놀라지 않은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일을요?"

"네. 프리랜서라 시간은 비교적 자유롭고… 사실 매일 오는 김에 조금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뭘 바라는 건지도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죠?"


"그렇지 않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설은 유리병을 다시 나무선반 위에 올려두며 말했다.


"그런 마음이 생기는 건, 고여있던 감정이 조금은 흐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어진 거죠."


서정은 그 말에 이상하게 안도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미묘한 감정에 '이상하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무너지려하던 마음의 균형이 다시 잡히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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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기의 디저트 레시피

체리가 올라간 커스터드 푸딩

들여다 볼 감정 : 자기혐오, 회피


재료

달걀노른자 3개

설탕 50g

우유 200ml

생크림 100ml

바닐라빈 (또는 바닐라 익스트랙)

체리 시럽 또는 설탕 절임 체리

진한 에스프레소 소스 (or 다크 카라멜)

약간의 소금


만드는 법

달걀노른자, 설탕, 우유, 생크림, 바닐라빈을 섞어 커스터드 베이스를 만든다.

체에 걸러 잔여물을 제거한 뒤 오븐용 용기에 붓고 중탕으로 굽는다.

식히고 굳힌 커스터드 위에 체리 시럽과 통체리를 얹는다.

마지막에 다크 카라멜이나 에스프레소 시럽을 아주 얇게 둘러준다.


기억해야 할 포인트

우리는 종종 무너지지 않기 위해 회피하지만, 무너지지 않으려면 언젠가는 느껴야 해요.
커스터드푸딩을 천천히 씹듯, 감정을 받아들이는 것이 회복의 시작이에요.


감정 해소 팁

회피와 자기혐오를 마주하는 연습

자기혐오는 ‘단단한 겉모습’ 안에 감춰둔 무른 감정의 집합입니다.
겉으로는 괜찮은 척, 애써 단정하게 살아가지만, 속은 늘 자책과 후회로 녹아 있어요.

회피는 이 모든 것을 애써 달콤하게 덮어두려는 시도입니다.
단맛으로 감정을 눌러보지만, 결국 입 안에 남는 건 쓰고 찝찝한 여운뿐이죠.

감정을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관찰 가능한 것’으로 바라보세요.
→ “왜 이 감정이 나왔지?”보다 “이 감정이 여기 있구나”라고 말해보는 연습이 중요해요.

스스로에 대한 말투를 바꿔보세요.
→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돼” 대신 “나는 지금 이런 마음이구나”로 바꾸는 것부터.

감정을 정확히 표현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단지 인정하는 것,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회피하는 습관을 바꾸어갈 수 있어요.





*해당 소설은 밀리로드에도 동시에 연재되고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좋아요와 밀어주기는 큰 응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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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