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악물고 “장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다과를 먹는 작은 모임이었다. 대화하다 보니, 모인 사람 대부분이 장녀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주제는 자연스럽게 가족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 자리엔 장녀 노릇을 하는 차녀도 있었다. 언니가 집안일에 통 관심이 없기 때문이란다. 우리는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돌아가며 고충을 이야기했다.
H는 점점 늙어가는 부모님을 염려했다. 다른 형제도 있지만 부모님이 아플 때마다 달려가는 건 으레 그녀의 일이 되었다. K는 동생의 장래를 엄마처럼 걱정하고 있었다. 수시로 반복되는 동생의 우울증 때문에 자신마저 우울증에 걸릴 것 같다고 토로했다. J는 철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위로하는 속 깊은 장녀였다. 하지만 아버지 욕을 가만히 들어주는 게 고역이라고 속내를 털어놨다.
나는 머리가 어지러울 만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뭉글뭉글 떠오른 질문 하나. “장녀는 왜 집안일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가족의 고충을 들어주는 상담사, 아픈 가족을 돌보는 간병인, 집안 문제를 해결하는 복지사.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역할을 장녀가 떠안았다. 많은 장녀들이 그렇게 살고 있었다니, 아찔했다.
어느새 장녀 모임이 돼버린 자리에서, 모두가 입을 모은 최고의 괴로움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었다. 너는 장녀니까. 누나가 참아야지.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생색조차 낼 수 없었다. 집안에 일이 생기면 발을 동동 구르고, 밤잠을 설치고, 하던 일을 내던지고 달려가는 마음.
그 진심 어린 노력과 사랑을 인정받지 못했다. 마치 장녀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천성인 것처럼.
장녀 독립을 선언한 건 4년 전 여름이었다.
“앞으로 가족 생일이다, 명절이다 꼬박꼬박 챙기지 않을 거야. 내가 하고 싶을 때 챙기고 싶어. 선물이든, 연락이든. 의무로 하지 않고.”
“그래? 남남처럼 살자는 거네. 좋아. 앞으로 모른 척하고 살아!”
엄마가 벌컥 화를 냈다. 평소라면 내가 괜한 말을 했어. 나중에 얘기하자, 얼버무렸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 말이 아니잖아! 장녀라는 의무감으로 살기 싫단 거야.”
나도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넌 나이 먹으면서 점점 이상하게 변한다. 갑자기 왜 이래! 너 혼자 편하게 살겠다는 얘기지? 그래, 그러자고!”
큰 잘못이라도 저지른 것처럼 매서운 비난을 들었지만, 어쩐 일인지 머릿속이 점점 선명해졌다. 이건 잘못이 아니야. 실수도 아니야. 날 위한 선택일 뿐이야.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원하면 그렇게 할게.”
입을 꾹 다문 엄마는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뒤엉켜 흘렀지만 되돌리지 않겠어. 이제는 끝내리라, 거듭 생각했다. 나에게 동의를 구하지 않은 삶, 부모의 짐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삶,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장녀의 삶을.
가족이 언제나 서로를 존중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가까워서 쉽게 균형을 잃고 존중은 사라진다. 나는 무너진 균형을 바로 잡고, 잃어버린 존중을 되찾고 싶었다.
천하의 나쁜 년이 돼도 좋아.
엄마가 욕해도 어쩔 수 없지.
이 악물고 “장녀 독립 만세!”를 외쳤다.
거저 주어지는 자유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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