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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된 관점이 없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인왕산 숲길

by 그믐

오늘은 인왕산 숲길을 걸어보려고 합니다.


경복궁역에서 내려 인왕산 숲길 방향으로 이동합니다.


인왕산 숲길 초입에 들어서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합니다.


출발한 지 30분 후 수성동 계곡에 도착했습니다.


몇 년 전 여름에 수성동 계곡에서 가재를 잡은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가재가 안 보이네요.

겨울 날씨 때문에 동면에 들어간 것인지, 사람들을 피해 다 도망간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직 해가 떠있으니 어쩌면 천적을 피해 어디 깊숙한 곳에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다시 기어 나오거나 할 수도 있겠네요.

지금 이 시점에 아무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것은 자기 생존본능이 유발한 생태습성 탓일 수도 있겠죠. 자기 선조의 행동 패턴을 유전적으로 학습한 결과이거나요.


왠지 가재처럼 살라고 하면 못 살 것 같습니다. 늘상 어둡고 좁은 곳에 자기 몸을 숨겨야 하는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한때 그런 운명에 종속되어 살긴 했지만 다시는 되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이 행복하다는 것은 아니고, 그나마 그때보다는 억압적 상황이 약간은 해소되었다고나 할까요.


적어도 현재는 제가 주체적으로 사고를 할 수 있고 회사에서의 근무 시간만 아니면 어디로든 이동 가능하고 자유로운 의견도 제시 가능하니까요.


사람마다 살아가면서 어려웠던 시절이 있을 것이고 자신을 정말 힘들게 했던 사람이 한두 명씩 있을 거라고 봅니다.


저도 예외는 아닙니다. 제 인생을 벼랑 끝까지 몰아붙인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 얼굴만 떠올려도 여전히 감정 제어가 잘 안 될 정도니까요.


그게 제 어머니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기에 가장 멀어질 수 있었던 어머니가 생각납니다.


살아오면서 어머니만큼 저에게 악랄하게 대한 사람을 겪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는 어렸던 저에게 수시로 거친 폭언과 상스러운 욕설을 내뱉고 폭행을 가했습니다.


어머니는 학교나 학원 등하교 일정 외에 저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집안에 항상 가둬놨어요. 제 바로 옆에 앉아서 감시하는 경우가 많았죠. 친구들과도 못 만나게 했고 만화책, 소설책, 티브이도 거의 못 보게 했습니다.


본인이 허가한 책이나 TV 프로그램만 보게끔 통제했습니다. 그 통제 범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바로 앞뒤 사정 가리지 않는 물리력이 동원되었어요.


10년이 넘게 어머니의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히스테리를 감내해야 했어요.


혹여나 밖에 몰래 나갔다가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심한 구타가 이어졌습니다.

잠도 잘 못 자게 했죠. 초등학생을 하루 4~5시간씩 밖에 안 재웠으니까요.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서 어머니가 풀라고 한 문제지를 붙들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밀려드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몰래 화장실 욕조 안에 들어가 잠들기라도 하면 순식간에 문을 박차고 들어와 사정없이 주먹과 발길질을 퍼부어댔습니다.


무방비 상태로 침대 위에 누워 있을 때 기습적으로 발로 짓밟는 공격도 자주 당했어요. 좁은 집에서 어머니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은 거의 없었죠. 수시로 어머니의 발과 주먹이 우박 떨어지는 것처럼 쏟아졌죠.


덕분에 온몸이 늘 피멍투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니가 싫다, 니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일상 속에서 자주 남발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악을 지르듯이 내뱉습니다. 그때마다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어머니의 일그러지는 표정이 지금도 저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 어머니가 낯설었습니다. 그 시절을 어떻게 제정신으로 버텨왔는지 신기할 따름입니다.


친구들은 방학이 되면 다들 좋아하는데 저만 그때 어머니와 붙어 있어야 하는 불행했던 기억이, 지금도 그 당시의 두려움과 무서움, 괴로움이 혼합된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납니다.


어머니는 제 성적이 올 100점, 최종통지표에는 올 ‘수’가 나오기를 고대했습니다. 시험 때마다 반에서의 등수와는 상관없이 틀린 개수를 산정해서 때렸어요.


창과 문이 굳게 닫힌 방 안으로 끌려들어가 얻어맞다가 도무지 아파서 방어 자세를 취하려고 하면 어머니는 저를 다시 부동자세로 서 있게 한 다음 냅다 얼굴 쪽으로 손바닥이나 주먹을 힘껏 내질렀죠. 구석에 거칠게 밀어 놓고 단단한 나무 빗자루 끄트머리로 얼굴을 사정없이 휘벼파듯이 공격하는 것도 다반사였습니다. 40대 중반으로 다가가고 있는 지금도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제 학업의지 고취를 위해서 그랬던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다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요즘 듭니다.


오히려 때릴 수 있는 명분을 본인의 성에 안 차는 제 성적에서 찾아낸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니까요.

이런 의심을 할 수 있는 까닭은 그 폭행의 강도가 정도를 넘어섰고 상당히 집요했으며 감정적이었기 때문이죠.


지금은 이렇게 담담하게 말로 표현할 수 있지만 그 당시에 당했던 어머니의 폭력을 돌이켜 보면 운이 좋았을 뿐이지 잘못했으면 어디 한 군데 불구가 되거나 자칫 죽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지금도 간담이 서늘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기분이나 자식으로서 누구나 공통적으로 받는 애정이라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어머니에게 좋은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으니까요.


당연히 생일이나 어린이날도 없었고요.


어머니는 기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두려움을 유발하는 존재였어요.


부모라고 해서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만으로 키울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폭력이 이해 안 되는 측면이 있습니다.


어머니에게 저라는 존재는 자식같이 느껴지지 않고 왠지 이질적으로 보였던 것 같아요. 어머니도 자주 그렇게 얘기를 했고요. 저는 결혼을 하지 않아 자식이 없기 때문에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에게 가지는 감정을 아직 완전히 이해할 순 없는 상황이긴 합니다.



어머니가 저를 괴롭힌 여러 요인 중의 하나는 아버지에 대한 어머니의 임계점까지 끓어오르는 화가 온전히 저에게로 전가된 것 같다는 것이죠.


아버지는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새벽마다 들어오긴 했는데 그것도 많으면 일주일에 두, 세 번 정도였던 것 같아요. (이 사실도 형제 중에 그 누군가와 의견이 상반됩니다. 서로 같은 부모를 겪었는데도 불구하고 상대방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언행을 상당히 미화합니다.) 돈도 모든 식구가 충분히 먹고살 만큼 벌어다 주지 않았고 자식 교육이나 부양에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독박 육아를 한 셈이죠. 모자란 생활비는 없는 시간을 쪼개 부업을 하면서 마련을 했고요.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모든 가정사를 다 떠맡기고 방관만 하고 있는 형국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밖에서 일은 했지만 그 일을 한다는 핑계로 친분이 있는 지인들과 함께 자유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거죠.

가족을 내버려 두다시피 하고 밖으로만 나도는 아버지가 야속했을 거예요. 이런 구도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못했습니다. 보통 어머니가 가부장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순종하는 편이었지만 아버지가 일하러 나가면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을 저를 향해 폭발적으로 쏟아낸 것으로 보입니다.


저를 향해 아버지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것이죠. 어머니의 관점 속에서는 내가 바로 아버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나는 너를 잘 알아’라는 어머니의 말은 저에게 아버지의 모습을 투영한 어머니의 무의식적인 경멸이지 않았나 의심이 듭니다.


‘나중에 커 봤자 지 애비 밖에 안된다’는 식으로 마음속으로 제 존재를 이미 단정 해놓았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총각 때처럼 아버지만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하는 게 싫었을 것이고 불평등하다고 느꼈을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자식이라도 마음대로 하면서 그게 자신에게 허용된 유일한 자유라고 착각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어머니와 아버지는 중매결혼이 아니라 당시 어른들의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연애결혼을 했습니다.


어른들은 아버지의 방탕자적 기질과 성향을 그 당시에 눈치채고 있던 걸까요.


현재로서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던 그 세기의 사랑이 두 사람의 애정의 상징으로 보이는 저를 무참히 학대하는 결실로 귀결되었다는 게 아이러니합니다.



어머니가 저에 대해 왜곡된 자기 관점을 가진 건 아버지의 방탕에 근본 요인이 있다고 봅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배후에는 가부장제라는 에피스테메가 경상도 사회 전체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아버지는 자기 방랑적이자 자기 향락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뒤틀린 자기만의 가부장제 관점에, 어머니는 제 존재를 아버지와 동일시한 관점에 빠져 있었죠.


둘 다 객관적인 사고가 안 될 정도로 편향적인 입장에 사로잡혀 있다가 제가 결국 그 폭력의 희생양이 된 거죠.


물론 어머니나 아버지나 주체적으로 그러한 입장을 스스로 형성해 낸 건 아닐 거예요. 보이지 않는 자신들만의 역사적 배경과 이해관계, 어렸을 때 수시로 겪어왔던 어른들의 강자우선주의 문화에 크게 억압을 받다가 그제야 저라는 해소창구를 찾은 건지도 모르죠.


걷잡을 수 없는 사회질서의 강압과 누군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상대적 약자인 저에게 자연스레 전도되며 수틀릴 때마다 수시로 집중포화를 쏟아낸 거겠죠.


그분들의 거친 행동 배경과 심리적 배후가 어떻든 간에 어떤 식으로든 편협한 관점에 갇힌다는 것은 항상 위험성을 내포하는 것 같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집중된 관점을 가진다는 것은 다른 방향이나 관점에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는 결과를 만드는 듯도 보입니다.


어떤 때는 타자에 대한 공감 능력이 사회통념을 넘어설 정도로 심각하게 상쇄되는 효과를 불러오기도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왜곡된 자기애적 관점에 빠진다는 것은 스스로를 상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이성능력의 상실로까지 이어지는 경우 역시 많이 봐왔습니다.


앞으로 적어도 저만큼은 부모님과는 달리 고정되고 왜곡된 관점이 없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인왕산 숲길이 끝나는 지점인 윤동주 문학관에 들어서서 전시장 내를 둘러보다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일본이 우릴 침략한 것도 배타적 자기 관점으로 타자의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욕이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교할 바는 아니겠지만 제 가족의 경우 그 비극이 작은 규모로 이뤄졌다는 것 외에는 본질적으로는 크게 차이가 없는 듯 보입니다.


우리의 인식 체계 내에서 상대방을 향한 왜곡된 자기 동일시화 기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각자의 삶을 구속시키는 관점의 끝이 있는 날이 올 수 있을까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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