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춘선 숲길
이번 주는 야근이 많았습니다. 일주일 내내 사무실 안에만 계속 앉아 있다 보니 주말에는 억눌려 있던 걷기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당분간 이렇게 걷기를 통한 일시적인 도피 형태로나마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평생 멈추지 못하는 게 걷는 것인 것 같습니다.
퇴근하고 집까지 걸어가고 편의점과 마트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집안에서도 걷기는 계속됩니다. 부엌, 화장실, 거실을 향해 걷습니다. 바로 길을 따라서 말이죠. 하찮고 보잘것없어 길 같아 보이지 않아도 나름 길은 길인 것 같습니다.
수많은 길을 걷다 보니 길마다 자기 얼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데는 구름이 많이 끼는 곳이 있는가 하면, 햇살이 특히 많이 내리쬐는 곳도 있고 바람의 강도 역시 각기 다릅니다. 길을 둘러싸고 있는 사방의 풍경도 가지각색입니다. 그러다 보니 길마다 들어설 때 떠오르는 생각 역시 다 다릅니다. 길마다 다소 다른 감정이 생기고, 길에 따라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색다른 기분과 마주치기도 합니다.
사람들마다 갖고 있는 개성이 다르듯이 길도 각각의 특색이 있습니다.
저는 저만의 길이 있었습니다.
근데 그 길이 한 두 개가 아니었어요.
제가 가진 수많은 길이 있었죠.
그 길은 전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모가 바라는 나, 학교가 바라는 나, 직장에서 바라는 나, 친구들이 바라는 나, 다양한 나의 모습을 갖춰야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 길을 만들어 놓고 그들의 주문에 따라, 그들이 원하는 바에 따라 번갈아 걷고 있던 거죠.
일관되지 않는 길을 걷다 보니 균형이 잡히지 않았고 모순에 빠진 제 모습을 발견했어요.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들이 오히려 인생을 불필요하게 간섭해 온 게 아닌지 의심이 들었습니다.
결국 내가 걸어온 길은 나에게 맞는 길이 아니었어요. 누군가 가르쳐주는 대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나의 길이라고 착각하며 걸어왔던 거죠.
오늘은 걸으면서 옛날에 힘들었던 시절의 기억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그 기억들이 반복적으로 곱씹어집니다. 아마 습관인 것 같습니다. 힘들게 살아왔다는 자기 확인을 통해 개인 차원에서 보상을 하고 싶지만, 좀처럼 성취되지 않는 이 기대 욕구가 계속 반복 투사를 하게 하는 요인인 듯 보입니다.
현재 미래를 예단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원망과 결코 바뀌지 않는, 저를 포위하고 있는 세계를 향한 회의감이 끝나지 않는 이상 이 습관적 되새김을 멈출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누군가 알려준 삶의 길에서 답을 찾고 그 여정에서 나름의 기준을 세워 왔습니다. 이 길들 만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계속 그 길들을 걷게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그 길들은 결국 그 길을 알려준 당사자들에게만 어울리는 길이었지 저에게는 낯선 길이었죠.
길을 걸으며 그토록 찾아 헤매던 해답도 어쩌면 나를 수단으로 삼은 그들을 위한 답일 수도 있었을 거고요.
그동안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 속에 엉뚱하게 갇혀 있던 거죠. 생각보다 오랜 세월을 말이죠.
걷다가 문득 뒤돌아보니 어느새 인생의 반을 지나쳐왔습니다.
여전히 제 뜻과 무관하게 어색하게 몇 개의 길을 번갈아 따라 걷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그 누구나 겪는 일입니다. 마뜩잖지만 일단 수긍할 수밖에요.
하지만 유일하게 혼자 걸을 때만이 본래의 나로서 편하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
혼자 걷는 이 길을 제외한 어느 길에서도 답을 찾지 않고는 살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혼자 길을 걷고 있으니 답을 찾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답이 있을 거라는 부담을 가질 필요 없이 편하게 걷기만 하면 됩니다. 굳이 애써 목표를 가지지 않아요. 가고 싶은 대로 어디로든 걷습니다. 애초에 답이 없기에 처음과 끝, 한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누군가 내 등 뒤에서 방향을 제시할 필요도 없겠죠.
지금까지 답을 찾기 위해 빨리 가야 한다는 조급함이 길을 더 멀어지게 만들기도 했고 덕분에 대체 어떤 길인지 알 수 없는 길이나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길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나와 다른 사람을 더불어 위험과 불쾌감, 곤경 속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아무 목적 없이, 기대감 없이 홀로 걸을 때에서야 더 이상 조바심을 느낄 필요 없었습니다.
괜스레 힘을 쓰지 않고 사방의 풍경을 오감 전체로 천천히 음미하며 걸어 나가는 겁니다.
여태껏 굳이 답을 찾기 위해 길을 걸을 필요가 있었나 싶습니다.
답이 없기 때문에 내가 가는 이 길은 이미 세상이 말하는 그 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