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남벽분기점, 원앙폭포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도합 12년 동안 학교에 몸담고 있으면서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시험을 치렀습니다.
특히 고등학교 때는 대입을 염두에 두고 있어서인지 내신점수를 위한 과목별 쪽지시험부터 시작해 중간고사, 기말고사, 수능대비모의고사에 이르기까지 시험에 대한 압박이 가장 심했습니다.
내가 다니던 당시 고등학교 선생님들의 통제력은 시험시간에 가장 큰 힘을 발휘했습니다.
학교 내에 존재하는 수많은 규칙과, 규정, 규제의 목적이 최종적으로는 시험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해 학교에서는 최대한 학생들의 몸과 마음 상태를 공부에 집중할 수 있게 교정시켜 놓아야 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선생님들은 그러한 통제적 환경을 만들기 위한 교도관들이었습니다.
시험이 시작되면 시간에 쫓긴다는 기분,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 느낌이 연쇄적으로 이어지면서 심리적 자기 고립이 최고조로 도달하는 순간을 매번 겪었던 것 같습니다.
시험이 끝나고 난 후 쉬는 시간에 학우들끼리 정답이 맞나 틀리나를 확인합니다.
정답을 맞힌 자는 안도감을 느끼며 내심 자기 승리감을 맛보는 것 같았습니다. 틀린 사람은 졌다는 패배감과 답을 맞힌 집단에 속하지 못했다는, 배제된 느낌을 받았던 것 같고요.
친구들 간에 우정이 있지만, 서로 경쟁해야 하는 모순을 감내해야 하는 학교 질서 안에 모두가 동등하게 순응하고 있었습니다.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던 때가 있었습니다.
선의라는 말은 포용적인 느낌을 주지만, 경쟁이라는 말에서는 왠지 비타협적인, 공격적인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 두 단어가 사이좋게 나란히 배치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거죠.
제가 세상 물정을 모를 정도로 멍청하거나 순진했던 걸까요.
‘선의의 경쟁’이라는 말은 결국 각자도생의 질서를 선의라는 말로 포장한 우리 모두를 향한 기만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습니다.
각 학교마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원리를 설립이념과 비전으로 내세우지만 제가 들어가서 경험한 학교들의 실상은 전혀 달랐습니다.
학교는 규칙과 규범을 통해 강자의 질서에 강압적으로 순응하게 만들면서 약자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정의를 가르쳤고 학우들끼리 이기기 위해 경쟁하고 선생님의 권력에 억압적으로 복종하게 하면서도 사회에 나가서 배려 깊고 개인성을 존중하며 베푸는 인간이 되라고 얘기했습니다.
어쩌면 학교는 세상에 널리고 널린 삶의 모순을 저항 없이 받아들이도록 교육하는 곳이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학교생활에서 배운 것은 그러했습니다.
문득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답이 하나만 있다는 생각으로 모든 사안을 쉽게 단정 짓는 오류에 자주 빠졌던 내 모습을 돌아봅니다.
실제로 사회생활에서 모종의 생소한 문제에 당면했을 때, 그 문제를 풀 수 없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 심리적으로 경직이 되었습니다. 이 당황스러움을 어찌해야 될지 모르면 감정적으로 흥분부터 하거나 끝 간 데 모를 울화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학교에서 치르는 각종 시험 문제의 답은 거의 암기식이 많았습니다.
문제가, 문제를 푸는 사람으로 하여금 창의성을 요구한다기보다는 일방적인 명령에 대한 답을 요구하는 방식에 가까웠죠.
답을 하기 위해 내가 그동안 교과서에서 보고 외워 왔던 것들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왜 이런 문제가 출제되었는지에 대한 인과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 이 문제를 풀어야 되는지에 대한 이유는 당연히 고려되지 않습니다. 그저 문제가 주어졌으니 풀어야 하는 거죠.
제한된 시간 내에 어떻게든 답을 명기해야 합니다. 나열된 문제에, 퍼즐 맞추듯이 외워온 답을 응용하여 끼워 맞춰 나갑니다.
장시간 이런 형태의 시험에 익숙해지다 보니 저런 유형의 문제에는 이 답이 맞고, 저 답이 옳다는 식으로 확증편향적 자세가 자연스레 길러졌던 것 같습니다.
덩달아 내가 푼 문제 위에 동그라미가 쳐질 때마다 만족도가 올라갔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체크한 답이 맞나 틀리나, 결과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저는 제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가 맞다는 것을 확인받기 위해 사실상 나의 우월감의 확인을 위해 시험을 수단으로 이용한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열심히 시험을 치르는 데만 몰두했습니다
그렇게 12년의 시간을 지내온 거죠.
세상에는 인간의 심리를 조종하는 다양한 침투 기제가 존재하지만 학교에서 부단히 지속했던 체벌과 감시,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벌어지는 수많은 통제적이고 강압적인 학교의 시스템, 최종적으로 한 공간에 모여 제한시간을 두고 집단으로 시험 치르기 자체라는 집중된 단일 요인이, 지금에 와서 제 심리에 어떠한 영향을 준 것인지 수시로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혹시 외우기만 했던 객관식 정답의 문제가 사회문제를 대하는 내 사고능력을 단순화시키는데 기여를 해온 게 아닐까.
평소 문제를 풀기 위해 외우는 것에 집착하는 지속된 행위가 감정적으로 흥분부터 하는 불필요한 자의식 과잉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던 걸까.
그래서 문제의 해결보다는 무가치한 부정적 감정 발산에만 우선적으로 몰입해 있던 게 아닐까.
문제를 풀 때 맞는 답과 틀린 답을 구분하는 것, 이게 아니면 안 된다는 이분법적 사고 능력의 반복된 학습이 문제에 대한 다양한 해결 방안을 차단시키는 단정적인 심리 패턴을 유도해 온 게 아닐까.
그래서 삶의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병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는 기분과 감정에 휩싸였던 게 아닐까. 실제 사회 문제에 직면하면 마인드 컨트롤이 잘 안 되면서 편협적인 신념만 거칠게 앞세웠던 건 아닐까.
또한 답을 알고 있는 문제만 풀어왔기에 마치 세상의 모든 삶의 문제에 답이 있는 것으로 전제해 온 오류를 범해 온 게 아닐까.
이 세상은 외운다고 해결되는 세상이 아닌데, 외우면 어느 정도 해결됐던 시험 문제처럼 사회의 무수한 아포리아를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만 취급하려고 했던 게 아닐까.
애초에 정답이 존재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학교는 각자의 머릿속에 정답이 있다는 착시를 주입시켜 놓은 게 아닐까.
학교에서 심어 놓은 정답의 세계라는 허상 속에 살고 있던 게 아닐까.
이렇게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모든 인과관계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객관적 지표와 근거도 부족하거니와 제 주관적인 기억과 다소 편향된 판단에서 비롯된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를 오랫동안 힘들게 했던 왜곡된 사고 작용 방식의 원인을 12년간 치러냈던 시험이라는 단일요인으로만 단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관할 수 없다는 의심은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또 반대로 이러한 생각도 듭니다.
반복적으로 치러진 시험과 학교의 생활이 살아오면서 그토록 제 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지금처럼 비판적 사고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면 거꾸로 시험과 오랫동안 지속된 학교생활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러한 사고능력이 배양된 역설적 상황에 제가 놓여 있는 것일 수도 있고요.
이 세상은 단 하나로 규정지을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모순과 역설의 끊임없는 난무하는 세계가 바로 제가 발 딛고 서 있는 이 세상인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 질서에 순응하여 살고 있는 거고요.
그리고 그 뿌리는 어느 정도 학교에서 시작되는 듯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