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림공원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이지만 제가 다니던 시절의 고등학교는 시험을 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모의고사뿐 아니라, 교과별로 따로 치르는 시험까지 있었습니다.
시험을 잘 쳐야 좋은 대학에 가고 연봉이 높은 회사에 취업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죠.
많은 학생과 그 학생의 부모들까지 앞다투어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기를 원합니다.
이런 상황이 전혀 이상한 게 아니죠. 하지만 그런 학교의 치열한 경쟁 문화가 저를 숨 막히게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공부를 잘 못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 동급생들과 경쟁을 하며 느끼는 학문적 성취감 같은 것은 거의 없었습니다.
제 성적에 관해서 제 스스로가 방관자 태도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막막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은 집안의 가난과 감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냉랭한 학교의 분위기가 학업 의지를 꺾어 놓기도 했죠.
억압적이고 권위적인 선생님들의 존재는 시종일관 심신을 그로기 상태에 머물게 했습니다.
학교 교실은 언제나 침묵을 강요하는 공간이었고, 발언권은 전적으로 선생님에게만 있었죠.
네모 반듯한 사각형태의 교실이라는 공간 안의 공기는 늘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동굴 같은 교실 안에는 선생님의 목소리만 기계적으로 울려 퍼졌죠.
수업 시간엔 개인에게 허락된 공간 역시 별로 없었고요.
교탁 앞에 서 있는 선생님의 시선 반경 안에 되도록 많은 학생들이 포착되어야 했으니, 좁은 교실 안에서 학생들의 책상과 의자가 밀착되어 붙어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두가 교탁 앞에 등대처럼 우뚝 선 선생님의 시선 앞에 평등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선생님의 시선은 저의 심연을 나직이 들여다보고 있는 어두운 빛과도 같았습니다. 그 빛은 제 마음을 하얗게 암전 시킬 만큼 강렬했습니다. 그때마다 벌거벗겨진 것처럼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교실 안에서 간혹 일어나는 선생님의 폭력은 제대로 눈을 뜨고 보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수업 시간에 졸거나 딴짓을 하다가 걸리면 분노한 선생님은 해당 학생을 불러 세운 다음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로 감정적인 폭행을 가하곤 했습니다.
그 살벌한 현장을 보고 있으면 언젠가 타깃이 내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공포심리가 온 정신을 지배했습니다.
수업 시간에는 로봇처럼 허리를 꼿꼿이 세운 부동자세로 선생님의 입과 눈을 똑바로 쳐다봐야 했습니다.
쉬는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긴장된 몸과 마음이 얼음 녹듯 스르르 풀어졌습니다.
등교 시각은 오전 7시까지였고 야간자율학습시간은 밤 10시 30분까지 이어졌습니다.
자율학습이라고 하지만 명백히 자율을 가장한 타율이었습니다. 야간자율학습시간 밤늦게 복도를 돌아다니는 간수 같은 선생님의 감시는 삼엄했습니다. 저는 하루에 보통 15시간에서 16시간 정도 강제적으로 학교에 묶여 있었습니다.
수많은 고등학교가 서울대에 더 많이 보내기 위해 경쟁을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매년 교문 앞에 서울대 합격자 수를 새긴 현수막을 큼지막하게 걸어 놓았습니다.
서울대에 합격시킨 숫자만큼 학부모들 사이에서 그 고등학교는 평판이 좋아졌고 명문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며 자연스레 학교의 지위는 올라갔습니다.
그 명문 고등학교라는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너 나 할 것 없이 스파르타식의 교육현장에 학생들을 밀어 넣었습니다.
그 긴 시간 좁은 교실 안에서 성적이 나쁘면 이뤄지는 비인격적 체벌, 선생님들의 기분을 만족시킬만한 다소곳이 복종하는 수업 태도, 갑과 을의 구도가 고착된 교조적인 가르침의 방식, 수시로 일어나는 강제적인 소지품 검사와 구체적 사유를 알 수 없는 일방적인 매질과 폭언의 반복, 획일적인 규칙과 비합리적인 규범의 준수, 시종일관 각 개인의 심신을 경직시키는 선생님들의 보이지 않는 통제와 감시 등, 왠지 감정과 기분을 가지지 않는 인간이 돼야 비로소 가능한 것들이 학교에서는 유일한 질서로 강조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고등학교가, 좋은 대학을 간 학생들이나 늘 정상권의 성적을 유지하고 있던 학생들에겐, 그러니까 적어도 그들에겐 제가 체감하는 만큼 나쁜 곳은 아닐 거라는 기억으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을지도 모르죠.
적어도 그들에겐 유용할지도 모를, 본인들에게만큼은 혜택을 주는 시스템이었을 테니까요.
그 당시의 학교는 누구를 위한 학교였을까요.
학생들의 미래를 위해 학교가 존재하다고는 다들 얘기하지만 학교에 직접 몸담고 있는, 저와 가까운 당사자 중에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아니 그렇다고 저는 이제 와서 믿고 싶습니다. 학생들을 위한다는 명분은 늘 그들의 감시와 통제, 폭력행위를 정당화시켜 주는 도구였으니까요.
학내 등수나 성적과 상관없이 학생들은 저마다의 다양한 방식으로 억눌린 욕구를 해소시키려 했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저급한 농담으로 웃긴 수다를 떨거나, 점심시간에는 축구, 농구, 레슬링 같은 격렬한 운동에 집착하고, 대담한 학생들은 야간자율학습시간을 제끼고 밖으로 나가 술, 담배에 취해 있거나 밤늦게까지 PC방에 들어가 빠져있는 식으로 말이죠.
누구나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양한 형태로 자극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이쯤 되니까 학교에서 약한 학생을 괴롭히는 행위도 자극을 느끼려는 행위 중의 하나가 아닐까 의심이 듭니다. 상대방을 무력화시키는 데서 오는 우월감에 빠져드는 쾌감을 반복적으로 탐닉하는 거죠.
마치 교실 안의 수많은 선생들이 상대적 약자인 우리에게 저질렀던 그 무의미한 폭력행위들을 따라 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죠.
선생이 일진들을 닮아 있던 걸까요. 일진이 서서히 선생들을 닮아 갔던 걸까요.
어른들의 세계를 무의식적으로 학습한 학생들이 그 숨쉬기도 어려운 좁은 학교 교실 안을 발판 삼아 그동안 어른들의 행동양식을 배워왔던 대로, 응축된 본성과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기라도 한 걸까요.
저는 한편으로 학교생활이 참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하루 종일 그 긴 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싶습니다.
지겨움을 억누르거나 견디는 것만 배우다 보니 늘 상상의 세계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머릿속에서 있을 법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 내가 원하는 세계에서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는 거죠.
점점 자기 세계에 갇힌 인간이 되어 갔습니다.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늘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싶었습니다. 대안 학교, 검정고시 등 대안이 있지만 정상의 범주에서 이탈한다는 두려움이 한 켠에 또 존재했습니다.
용감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강하게 보이기만을 바라는 겁쟁이었죠.
고3 막판에는 나름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습니다. 모두가 다 가는 대학을 못 갈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가정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 3년 동안 수업비, 급식비를 한 번도 못 내는 걸 알면서도, 당연히 대학에 갈 등록금도 없을 텐데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다 함께 몰려가는 길에 저만 뒤떨어져 있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만으로 위안을 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에 와서 고등학교에서 뭘 배웠는지 잘 기억이 안 납니다.
심성이 좋지 않은 학우들에게 치이거나 놀림을 당하고 선생님들에게 체벌받던 고통의 흔적만이 남겨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자기 고립이 팽배한 삭막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특정 친구들과의 우정, 그리고 몇몇 선생님들에 대해 어렴풋이 기억나는 존경심, 그들 간에 가끔씩 피어나는 인간적인 애정은 사라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 누구 하고도 연락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저와 함께 했던 그 사람들은 이제 와서 서로가 서로를 어떤 식으로 기억하고 있을까요.
그 당시의 고등학교 생활은 그들에게 어떤 느낌으로 각인되어 있을까요.
기나긴 고등학교 생활이 저에게 남긴 건 지금에 와서 아무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누가 공부가 가장 쉽다고 했을까요. 저에게 있어 그 시절의 그 공부가 가장 잔인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