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우도
어쩌면 학교 교사와 직장 상사, 부모는 자기 나름대로의 원칙에 따라 저를, 그들이 상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 같아요. 사실 그들 자신 스스로도 불완전하면서 말이죠.
정작 나 자신은 그렇게 살고 있지 못하면서 왜 상대방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려고 하는 걸까요.
다른 사람을 제외한 본인만큼은 관점적으로 옳다는 착각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일까요.
그들은 각기 다른 관점으로 저를 개조하려 했지만 개조하려는 행동 자체가 하나의 세계이자 한 개인의 내면을 억압하는 정복 행위라는 것을 알지 못한 것 같습니다.
누구나 각기 다른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있고 그 관점을 뒷받침할 근거를 가지고 의견을 내세우고 주장을 펼치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각자 저마다의 생각에 자유롭게 몰두해 있습니다. 생각과 생각이 이어지고 초점화되면서 자연스레 관점이 형성되고 그렇게 생긴 자기 특유의 가치관과 의견에 많은 이들이 동조하길 바라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 세계 내에서 나의 관점은 대체로 고려되지 않는 것 같아요. 다른 이들 역시 나와 비슷한, ‘자기만의 관점’ 이 형성된 사고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죠.
날마다 벌어지는 크고 작은 수많은 내면 갈등과 외적 싸움은 '관점'이라는 자기중심적 사고를 형성하는 불완전한 인간 두뇌가 일으키는 필연적 과정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또다시 고개를 듭니다.
지금까지 경험해 온 바를 다시 톺아보면, 관점이라는 것은 실제 외부 세계를 똑바로 볼 수 있는 시선을 왜곡시키는 것 같다는 거죠.
물론 살아가면서 불가피하게 특정 입장이 필요할 때도 있겠지만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관점을 가진다는 것 자체에 이처럼 뚜렷한 한계점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어린 시절 계모와 할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아버지는 무너진 자존감을 저를 통해 새롭게 구현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건지도 몰랐고 배움의 끈이 짧은 어머니는 자신의 자격지심을 나에게로 전가시킨 것인지도 몰랐죠.
학교 선생들 또한 자신들이 학생일 때 당했던 윗세대 선생님들의 폭력에 대한 보상 욕구를 다시 제자로 들어온 학생들에게서 찾으려고 한 건지 모르고요.
저 또한 이들에게 당한 피해를 다른 상대방을 통해 심리적으로 보상받으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죠.
상대방을 자신의 결핍 욕구 충족을 위한 도구로 삼는 것, 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보는 게 아니라 자기 지향적 관점 안에 포섭하여 조종하는 행위 자체에 즐거움을 두는 것도 자기중심적 쾌락의 한 양상으로 보여집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보다 ‘내 자신’이 중요하다는 욕망에 사로잡힌 결과일 수도 있다는 거죠.
어떻게 보면 자기 결핍에 의해 빚어진 왜곡된 관점이 상대방에게 투영되면서 발생한 비극적 상황이겠죠.
서로가 서로를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으면서 적정 선을 지키며 관계 맺을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는 날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 경험상 한 개인이 사람들 간의 관계망 안에 속해 있으면서 갈등과 반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길은 아무래도 찾기 어려워 보입니다.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이러한 불가피한 충돌들이 삶에서 받아들여야 할 거스를 수 없는 운명처럼 보인다고나 할까요.
지금까지의 제 삶을 돌이켜 봐도 관계 맺기에 있어 끊임없이 실패하고 지금도 여전히 실패하고 있습니다.
실패했기 때문에 수많은 관계로부터 도피하여 지금처럼 혼자 있기로 한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이렇게 홀로 지내면서 그나마 성과가 있다고 한다면 자기모순에 빠진 ‘나 자신’과 마주하는 경험 정도는 한 것이라고나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