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라산
오늘은 한라산을 오릅니다.
제가 묵고 있는 숙소 근처 서귀포올레시장에서 첫 버스를 타고 오전 7시쯤 성판악 주차장에 도착해 내렸습니다. 관음사 코스는 정비 공사로 통제가 되면서 백록담까지 갈 수가 없어서 성판악 코스로만 왕복할 계획입니다.
고도 770미터에서 시작합니다. 성판악 코스는 들머리가 완만한 경사로 시작되어 걷기가 대체로 수월한 편입니다.
날씨 예보에는 오늘 흐리다고 했는데 막상 오르기 시작하니 맑은 하늘이 계속 이어집니다. 그래서 기분이 더 좋습니다.
생각지 못한 빗나간 예측은 고정된 틀을 와해시키는 인식 전환의 계기가 되기도 하죠.
앞으로 이런 날이 저에게 계속 찾아왔으면 좋겠습니다.
산행하면서 기온은 16도에서 17도를 왔다 갔다 했습니다. 짧은 팔과 반바지를 입었는데 벌레가 없어 좋았고 바람도 불어 시원했습니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메고 있는 배낭이 무거웠다는 건데요. 필요 이상의 이온 음료와 행동식을 챙기는 바람에 어깨와 허리 쪽에 부담이 조금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전에 한라산을 오를 때 힘들었던 점을 상기하며 의식적으로 더 챙겨 넣은 것 같습니다.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예전과 달리 체력이 월등해졌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성판악 코스는 오르는 길이 단조롭고 비슷한 풍경이어서 조금 지루할 수도 있지만 그만큼 편안한 마음으로 여유롭게 오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험한 산을 많이 다녀본 입장으로서 상대적으로 부담스럽지 않은 코스였습니다.
속밭 대피소에 성판악 주차장에서 출발한 지 50분 만에 도착했습니다. 행동식과 이온음료를 챙겨 먹고 간단히 정비 후 다시 출발했습니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나 진달래 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그렇게 힘들지는 않습니다. 4대 종주 중 한 곳을 성공한 이후로 아무래도 체력이 크게 강화된 것 같습니다.
5월 초에 혼자서 불수사도북을 완주했습니다.
불수사도북 산행을 끝내고 다음 날 길을 걷다가 다리의 힘이 풀려 넘어지면서 핸드폰이 부서진 적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핸드폰을 새로 사는 게 아깝지 않았습니다. 무척 힘든 산행이었지만 핸드폰과도 맞바꿀 수 없는 값진 경험이었거든요.
혼자서 그 어려운 산행을 해냈다는 자부심이 컸습니다.
화랑대역에서 시작해 공릉백세문을 지나 불암산, 수락산, 사패산, 도봉산, 북한산을 차례로 통과했습니다.
빛이 없는 야밤에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도 했고 거친 밧줄을 붙잡고 긴 암벽을 내려오다가 가파른 비탈길을 만나 미끄러지기도 했습니다.
무릎 부상을 당하고 난 뒤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아갔습니다. 사패산 정상을 찍고 포대능선을 지나는 길이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눈앞에서 파노라마로 펼쳐지는 도심을 덮은 운해 풍경이 기가 막혔습니다. 다친 무릎의 고통을 다 잊을 만큼 말이죠.
어느덧 다시 밤이 찾아왔고 불수사도북 코스의 마지막 봉우리인 북한산 족두리봉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길을 잃고 헤맸습니다. 어둡다 보니 밝을 때는 익숙하던 길이 사뭇 처음 보는 길로 느껴졌습니다. 결국 걷다가 지쳐서 가파른 절벽 쪽에 있는 바위 위에 배낭을 내려놓고 퍼질러 앉았습니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 수많은 불빛으로 찬란한 도심 풍경을 내려다보았습니다. 잠시 뒤 다시 일어나 조심히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산행을 끝내고 은은하게 비치는 가로등을 따라 잘 정비된 아스팔트 길을 걸으니 긴장되었던 온몸의 근육이 이완되면서 마음 한켠에 안도감이 밀려왔습니다. 편의점에 들어가 이온음료를 마시면서 문명의 소중함이 이토록 절실하게 와닿았던 적이 없던 것 같습니다.
편의점에서 나와 불광역에 도착했을 때 그제야 다 끝났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왜 그렇게 서러운 감정이 걷잡을 수없이 밀려오던지 좀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더군요.
스마트워치를 확인해 보니 총 52킬로를 걸었고 산행 시간은 23시간 54분, 7,843 칼로리가 소모되었습니다.
생애 큰 도전이었고 잊히지 않는 험난한 산행이었습니다.
반면 한라산은 천천히 경치를 음미하며 산책하듯이 걸을 수 있어 좋습니다.
한라산뿐만 아니라 각 산마다 특색이 있고 매력이 있습니다. 어떤 산을 오르든 멋진 풍경을 보니 좋습니다.
기분이 상쾌해지고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도 사라지는 느낌입니다.
진달래 대피소에서 나와 가파른 데크길을 오르다가 문득 주위를 돌아봅니다. 산 중턱에 걸린 구름이 신기합니다. 도심 일상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멋진 광경에 경외감을 느낍니다.
진달래 대피소 이후 계속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긴 하지만 천천히 호흡을 내쉬면서 올라가면 크게 어려울 게 없습니다. 곧 정상에 다 와갑니다.
정상을 찍고 다시 내려갑니다.
몇 년 전 처음 한라산을 왕복했을 때 8시간 ~ 9시간이 걸렸습니다. 산행이 끝나고 나서 며칠간 다리 통증으로 제대로 걷지도 못했는데 오늘은 5시간 만에 완주를 하고도 다리 통증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난 몇 년간 참 많이 걸었는데 덕분에 다리도 덩달아 튼튼해진 것 같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그리고 그 길을 무탈하게 완주했을 때 기분이 참 좋습니다.
내가 자발적으로 계획한 것을 나 홀로 실제 달성하면 뭔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드는 거죠.
세상에 수많은 길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인터넷 지도로 충분히 예측할 수 있어 대체로 길을 잃을 위험도 없습니다. 덕분에 어느 정도의 체력과 방향 감각만 있으면 성공적으로 끝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 확실성이 길을 향한 제 걸음을 추동하는 본질적인 힘이기도 합니다.
제가 걷고 있는 길은 지금까지의 불투명한 삶과는 달리 분명한 완결성이 존재합니다. 그렇게 길고 험난한 코스를 통과하고 나서 그 길을 완주했다는 성취감에서 오는 뿌듯함이 좋습니다.
길을 걷기 위해 미리 계획을 세웁니다. 기상 조건에 따라 그에 걸맞는 기능성 의류를 준비하고, 거리와 온도에 맞는 행동식과 이온음료를 구비합니다. 그리고 들머리와 날머리, 시작점과 완결점을 지정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계획을 짜는 것도 하나의 틀을 형성하는 것이고 그 틀 속에 안주하면서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나 스스로를 제한하는 행위인 것 같지만 다른 사람이 나를 제한하는 것과는 반대로 오히려 만족감이 드는 건 왜일까요.
아마도 이런 일련의 능동적 행위들을 통해 나의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나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남을 이용해서 심리적 만족감을 느끼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의 자발적 행동을 통해 비로소 억압되어 있던 나를 진짜 나일 수 있게 하는 것에 소소한 기쁨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