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왕산
SNS는 개인의 갤러리죠. 자신의 상상적 만족을 허구적으로 현실화해 놓은 가상공간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람들이 SNS를 보며 떠올리는 ‘나’는 사실 일시적인 순간에 존재했던 찰나의 나죠. 그러니까 지금 현재의 시점의 ‘나’가 아닌 거죠.
한 사람이 내보인 일면을 가지고 저는 그 사람 전체를 판단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내 시야에 비친 단편적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라고 일반화해서 단정 짓는 사례가 지금까지 많았던 것 같아요.
상대방이 가까운 친구나 같이 사는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예외는 없던 것 같아요.
적어도 제 경험상 그렇게 단정 지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상대방에 대한 고정관념에 쉽게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SNS와 매스컴에서 비추는 사진이나 이미지, 수많은 영상들이 앞뒤 인과관계가 생략된 채로 제 시각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관찰하고 있는 시선을 편향적으로 조각내는 거죠.
저는 조각난 부분 이미지에 함몰된 채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상대방에 대한 나만의 관점을 자연스레 구축해 나갔던 것 같습니다.
내가 투영한 이미지에 따라 생각해 왔던 그 사람이, 예기치 못한 행동을 하거나 예상에서 벗어난 어떤 말과 행동을 할 경우 위선을 느끼거나 크게 당황했습니다. 그 결과 상대방에 대해 언짢아지거나 속으로 밑도 끝도 없이 화가 치밀기도 했습니다.
아니면 완전히 반대로 그의 화려한 단편적 이미지에 취하여 선뜻 저조차 이해하기 힘든 경외감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습니다. 내가 본 일부 이미지만 믿고 상대방을 근거 없이 신뢰하고 무지성으로 따른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나 행동은 무조건 옳다고 전제하고, 부조리한 일에 관여해 있더라도 나름대로 합리화를 하며 오히려 불쌍하다는 연민까지 느끼게 되는 거죠.
결국 제가 만들어낸 한 사람의 왜곡된 이미지에 함몰되다 보니 스스로를 기만하는 상황까지 도래하는 거죠.
저는, 이미 상대방이라는 실재보다 제 관점에 의해 직조된 가짜 상대방의 이미지와 관계하며 소통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정작 그 사람은 내 앞에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데도 말이죠.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죠. 상대방이 실제로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저 혼자 상상 속에서 그 사람과 대면하고 있는 거죠.
왜 나는 나의 어림짐작과 추측으로 각인된 상대방의 이미지에 이처럼 쉽게 사로잡히는 걸까요.
나는 왜 자꾸 상대방을 내 편향된 의식 안에서 자기 편의 대로만 단순화시키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상대방이라는 실재를 외면하고, 그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속속들이 실제로 관찰한 것도 없으면서 머릿속에서 펼쳐지는 또 다른 가상의 상대방 이미지를 오히려 진짜로 여기는 이유는 뭘까요.
제 자신만 하더라도 일상생활을 관찰해 보면 얼마나 단순하지 않은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내면이 얼마나 복잡한지, 하루에 느끼는 감정과 기분이 얼마나 다양하고 그로 인해 비롯되는 생각과 행동 또한 얼마나 천차만별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다양한 저의 감정과 기분을 가지고 여러 상황에 맞닥뜨립니다. 착할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 이중적인 면도 있고 옳은 말을 할 때도 있지만 나쁜 말을 할 때도 있죠. 일관적이지 않습니다. 시시각각 변합니다. 그게 바로 접니다.
이렇게 앞뒤가 안 맞는 인간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게 ‘나’라는 사람의 실체인 것 같습니다.
상대방도 이런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는 걸 분명히 잘 압니다. 하지만 상대방을 나의 시선 안에 고정시킨 채로 여전히 내 마음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상대를 실제 지근거리에서 마주하여 오감으로 판단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명확히 자각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의식은 확인되지 않은 망상을 만들어내는 반복된 습관에 너무나도 쉽게 사로잡혀 있습니다.
이렇듯 제 의식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편향된 지향성 속에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내가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내 감정과 기분이 이끄는 대로 내가 만나고 보고 싶은 새로운 타자를 마음속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저를 힘들게 했던 많은 이들이 그리고 알게 모르게 제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했던 결정적인 요인이 이렇게 막연히 상상했던 상대방의 이미지가 진짜가 아닌데도 진짜처럼 의식 안에 깊게 뿌리 박히면서 발생했던 것 같아요.
그 사람의 실재는 도외시하고 또 다른 가상의 상대방을 만들어 머릿속에서 상대하면서 왜곡된 관점이 더욱 심화되었던 거죠.
이렇듯 이러한 의식 도식 작용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다 보니 그 상대방이,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따라 내가 원하는 관점의 ‘그 사람’으로 살아주기를 원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상대방을 내가 만들어낸 틀 속에 가둬버린 거죠. 그 사람의 실제 입장이나 기질과 성향, 처한 상황, 의견 등은 전혀 고려 않은 채 말이죠.
그와 반대로 타인들의 상상적 욕구에 의해 구성된 나를 향해 정성껏 복무하면서 그 상대방들의 기대 욕망을 충족시켜주기도 합니다.
그렇게 그들이 만들어낸 나의 이미지상에 가깝거나 부합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서로가 상상 속에서 꾸며낸 가짜 상대방과 소통하며 관계를 맺는 거짓 관계인 거죠.
쌍방 간 기만을 하더라도 이 관계가 각자의 결핍 욕구를 채워줄 수만 있다면 서로를 만족시켜 줄 수만 있다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괜찮은 걸까요.
아마도 괜찮으니까, 저를 포함한 많은 이들이 그런 식으로 계속 관계를 맺고 있는 건지도 모르죠.